낮엔 교실에서 밤엔 링에서, “복싱은 가장 정직한 스포츠죠”

2015.07.01 09:00:00

“인생은 난타전이야. 상대방의 펀치를 맞으면서도 조금씩 전진하며 하나씩 얻는 게 중요한 것이야.” 영화 록키의 명대사 중 하나다. 사각의 링에서 승패를 가르는 복싱. 그 원시(原始)의 현장에서 챔피언을 향해 구슬땀을 흘리는 여교사가 있다.

복싱 격언 중 ‘넘어져 봐야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있다. 패배와 실패에 굴복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그녀는 ‘이기기 위해 복싱을 한다’고 말했다. 결코 좌절하지 않겠다는 당찬 각오다.


지킬과 하이드, 링 위에 오르면 달라지는 이중생활

낮엔 분필을 잡고 밤엔 권투 글러브를 끼는 여교사가 있다. 다이어트도 하고 호신술도 배울 겸 복싱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잽, 잽, 라이트 훅에 이어 왼손 어퍼컷까지. ‘쉭 쉭~’ 허공을 가르는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여성복서 김밝음 교사(사진).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사각의 링은 가혹한 무대 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경험한 것일까. 그녀는 복싱을 가장 정직한 스포츠라고 정의했다.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실력으로 보상을 해준다는 것이다.

김 교사를 만나기 전, 찢어진 눈매, 다부진 어깨, 거친 주먹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권투하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이란 부자연스런 이미지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오후 3시, 부천심곡초등학교 4학년 4반 교실 문을 연 순간 감색 반팔 원피스 차림의 ‘앳된 선생님’이 일어섰다. 서울에서 부천까지 한 시간 동안 상상했던 ‘여성복서’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뜸 주먹을 보자고 했다. 꽉 쥔 모양새가 다부져 보이기는 했지만 고운 손이었다.

“손은 그대로 네요?”, “ 글러브끼고 하는 것이니까 거칠어 질 이유가 없어요.”
“펀치는 센 편인가요?”, “전 인파이터예요. 스트레이트 연타가 특기죠.”
“보기에는 평범한 여선생님인데요.”, “여긴 학교잖아요. 링에 오르면 달라져요. 호호”

그러고 보니 잠시 대화하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지난 2013년 겨울,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하던 그녀는 면접을 앞두고 권투 글러브를 처음 잡았다. 공부 스트레스도 풀고 면접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였다. 처음엔 그저 살이나 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막상 샌드백을 두들기다 보니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아마추어 복싱대회에 출전할 만큼 강한 파이터로 변신했다.

생활지도에서도 복싱 효과 '톡톡'


“상대방 얼굴에 펀치가 꽂힐 때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죽을 만큼 힘들다가도 순간의 짜릿함에 글러브 끈을 다시 조이게 됩니다.”

김 교사는 매일 한 시간씩 복싱 도장에서 운동을 한다. 조만간 있게 될 아마추어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서다. 복싱의 성패는 체력. 줄넘기와 근력운동에 집중하는데 요즘 같은 날씨에는 땀을 비 오듯 쏟는다.
 
“학교에 출근한 첫날, 복싱을 한다고 했더니 선배 선생님들이 엄청 놀라시더라고요. 친근한 운동도 아니고 여자가 하기에는 거친 면도 있어서겠죠. 무엇보다 얼굴 다칠까봐 걱정들 많이 하셨어요. 이제는 다들 응원해 주세요.”

여교사와 복서의 이중생활(?)이 때론 힘들지만 김 교사는 학생지도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자신이 가르치는 반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호신술을 가르치는 등 복싱을 응용한 실생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을 스스로 지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복싱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호신술을 알려줬더니 여학생들이 무척 좋아 하더군요.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았고요.”

그 뿐 아니다. 말썽 많은 개구쟁이들과의 기싸움에서도 복싱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학기 초에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시험하곤 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복싱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녀석들이 움찔하더라고요. 두 주먹 불끈 쥐고 섀도 모션(shadow motion)을 보여주면 부러움 반 신기함 반으로 절 쳐다봐요.” 김 교사 반에서는 왕따나 학교폭력은 찾아볼 수 없다. 제법 덩치 큰 아이들도 그녀 앞에서는 얌전한 학생 일 뿐이다.

복서로서의 꿈? 교사로서의 꿈? ‘진정한 챔피언’

복서로서의 꿈? 김 교사는 챔피언이 되는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복싱을 그만두는 순간까지 챔피언을 향해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왜 챔피언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이기고 싶어서" 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속내를 다시 짚어봤다. “누구나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모두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패배는 실패인가?”

“그 뜻이 아닙니다.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보여주고 싶어요. 학생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제가 챔피언에 도전하는 이유입니다.”

그녀가 필리핀의 복싱영웅 파퀴아오 선수를 존경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세계 챔피언을 여덟 체급이나 석권한 그에게서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교사로서의 꿈은 무엇일까? “학생들이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체육입니다. 하지만 체육수업은 일주일에 고작 2~3시간에 불과해 우천으로 야외 수업이 취소되면 아이들이 얼마나 서운해 하는지 몰라요. 에너지는 넘치는데 체육활동은 못하고…. 하루에 5분이라도 매일 매일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다. 교직 2년차 새내기 교사이지만 남은 교직생활 동안 ‘행복한 교육, 행복한 학생'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진정한 챔피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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