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 봐, 내가 안 믿을게!

2016.07.01 09:00:00

어떤 중년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부부간에 서로 인정하고 아끼는 것이 부족했다. 특히 부인이 심했다. 남편 말이라면 도무지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이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가로막았다. “아니,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아, 잠자코 있어요.” 부인은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부인이 워낙 당차고 거센지라, 남편은 달리 대꾸하지를 못했다. 젊은 시절 한두 번 아내에게 큰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이 난 적이 있었던 터라, 더더욱 기를 펴지 못했다. 남편은 아내가 정말로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소 급하고 직선적인 아내의 성격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의 이런 말버릇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심해졌다. 집에서 단둘이 있을 때는 무어라 해도 괜찮은데,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여럿이 어울릴 때는 곤혹스러웠다.

지난 연말 부부 동반 송년회 모임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모임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지난 한 해 그 댁에서 기장 행복했던 일은 무엇이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이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온 일이었다고 대답하는 중에 아내가 가로질러 나섰다. 남편을 쳐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아니,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아, 잠자코 있어요.” 그녀는 그게 아니라 손주가 무슨 전국대회에 나가서 일등상을 타 온 것이라고 수정 발표하였다. 늙어가며 서로 토닥거리는 것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부부가 보여주는 애정의 일상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정도가 심했다. 남편은 물론이고, 참석자 대부분이 민망함을 느끼는 분위기이었다.

남편은 아내가 정말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아내가 진정으로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에 방책을 강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편은 의사를 하는 친구에게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부탁했다. “여보게, 내가 여기서 하얀 시트커버를 덮어쓰고 침대에 누워있을 테니까, 자네는 내가 갑자기 죽었다고 내 아내에게 연락해 주게. 아내가 와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네.” 의사 친구는 남편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 의사의 전화를 받은 아내는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왔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한 아내는 너무도 슬프게 울었다. 그동안 말을 모질게 한 것을 뉘우치며 후회의 울음을 끝도 없이 흘렸다. 남편은 아내의 사랑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순간 아내를 너무 심하게 놀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이 시트커버를 내리고 얼굴을 내밀어 울고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 사실은 안 죽었어!”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아내의 대갈일성(大喝一聲)이 터져 나왔다. “아니,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아, 잠자코 있어요. 의사 선생이 죽었다고 하잖아요.”

앞의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현실적 사건(real event)이라기보다는, 불신 지향의 성격이나 독선의 심리를 풍자하여 만들어 낸 유머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떤 현실적 사건 못지않게 우리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실에서 “말해 봐, 내가 안 믿을게!” 물론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심리적 태도 면에서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어떤 갈등과 대립을 거쳐 오는 동안 큰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말해 봐, 내가 안 믿을게!’라는 심리적 태도가 있다. 문제는 이런 심리적 태도가 갈등의 대상에게만 투사되는 것이 아니고, 소통의 상황에서 모든 소통 대상으로 확산된다는 데에 있다. 불신 마인드가 일반화된다는 것이다. 이 심리가 강해지면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고, 모든 것을 음모론의 시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사람과 소통하는 사람은 괴롭고 힘들다. ‘말해 봐, 내가 안 믿을게!’의 심리는 일종의 괴물이다. 우리 마음 안에, 열등과 소외의 상처가 있는 음습한 그늘에 숨어서, 소통의 싹을 잘라먹고 사는 괴물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박인기 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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