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초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공영방송 KBS에서 내년 1월 방송 예정으로 기획한 대하사극 ‘정약용’이 엎어졌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연정훈이 타이틀 롤을 맡고, 12부의 대본이 나오고, 출연진의 대본 리딩까지 잡혀있던 ‘정약용’의 제작 무산이다. 이는 앞으로 지상파에서 정통 역사극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기에 충격이 컸다.
그만큼 대하사극은 공영방송 KBS만 할 수 있는 독보적 프로젝트라 할만하다. 폐지가 아니라 보류라 말해 여지는 남겨놓은 상태지만, KBS는 수익성 타령에 함몰되어선 안된다. 1981년 ‘대명’을 시작으로 35년 동안 40편을 선보인 KBS 대하사극의 방송역사가 끊기는 것은 비단 한 방송사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KBS는 일본 공영방송 NHK가 1960년대부터 50년간 이어오고 있는 대하사극 방송의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퓨전사극 등 역사를 마구 비틀고 뒤집어 막장 또는 황당함이 도를 넘는 지경에 이른 상황이라 대하사극은 ‘수신료의 가치’ 그 이상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수익성 때문에 대하사극을 아예 폐지한다면 수신료의 가치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공영방송 KBS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다. 바로 ‘KBS 드라마 스페셜’ 방송이다. 지난 해 15편보다 5편이 줄어들긴 했지만, ‘KBS 드라마 스페셜’은 지상파 방송을 통틀어 유일한 단막극 프로이다. 드라마 홍수시대라는 말이 회자된지 오래지만 자취를 감추다시피한 단막극의 명맥을 ‘KBS 드라마 스페셜’이 잇고 있는 것이다. 장한 일이다.
10편의 단막극은 일단 지난 해와 다르게 안정된 편성으로 방송되었다. 9월 25일부터 11월 27일까지 매주 일요일 밤 11시 40분 KBS 2TV 전파를 탄 것. 토요일 밤 1TV로 재방송하고 있어 아직 종영된 건 아니다. ‘빨간 선생님’⋅‘전설의 셔틀’ ⋅‘한여름의 꿈’⋅‘즐거운 나의 집’⋅‘평양까지 이만원’⋅‘동정 없는 세상’⋅‘국시집 여자’⋅‘웃음 실격’⋅‘아득히 먼 춤’⋅‘피노키오의 코’ 등 10편을 모두 보았음은 물론이다.
10편의 단막극은 ‘2015 KBS 극본공모’ 수상작과 우수콘텐츠진흥기금 지원작들로 이뤄져 있다. 본격 감상에 앞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늘어난 스폰서다. 초반 5개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지만, 갈수록 늘어나 협찬사가 15개 정도 되는 드라마도 있었다. 단막극의 미래를 위해 아주 고무적이고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0편의 단막극은 일단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관심을 끈다. 그중 ‘빨간 선생님’⋅‘전설의 셔틀’⋅‘동정 없는 세상’ 3편이 학원물이다. 각각 1980년대 안기부원이 설쳐대던 엄혹한 시절 교사의 제자사랑, 학교폭력 피해학생의 ‘짱’으로의 유쾌한 변신, 고3 학생들의 성적(性的) 호기심에 관한 보고서로 요약할 수 있다.
3편 모두 자연스런 유머코드를 심어 웃음과 함께 쏠쏠한 재미를 안겨주고 있다. 먼저 ‘빨간 선생님’은 신규 여교사의 학생인권 침해 운운이 좀 뜬금없어 보이지만(1985년 그 무렵엔 학생인권이란 단어조차 없었으므로), 소설 ‘장군부인의 위험한 사랑’이 갖는 은유를 통한 군사독재정권 풍자가 만만치 않다. ‘전설의 셔틀’은 학교폭력이란 심각한 현실 호도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변주가 새롭게 와닿는다.
교무실 담임 책상 위에서 “한번 하자”며 옷 벗는 쇼킹한 장면으로 시작한 ‘동정 없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10대들의 섹스에 대한 궁금증을 건강한 이성적 욕구로 접근한 앵글이 영 새롭게 다가온다. 다만, 제작비 탓인지 몰라도 룸살롱 호스테스들이 너무 늙어 보이고, 그나마 한참 못생긴 여자들로 나온 건 옥에 티라 할까.
‘한여름의 꿈’과 ‘국시집 여자’도 산뜻한 수채화처럼 시선을 끌었다. 그만큼 재미있는 드라마였다. 반면 ‘즐거운 나의 집’⋅‘평양까지 이만원’⋅‘아득히 먼 춤’은 다소 난삽한 느낌을 주었다. 비일상적이고 덜 보편적 이야기로 이해가 안되거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단막극은 내년엔 안보았으면 한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단막극의 미래를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