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서리가 내렸다. 마늘밭, 언덕배기 갈잎들은 서리에 덮여 희끗희끗하다. 오직 파란바다만 무청보다 더 싸늘한 빛으로 한기를 토닥이고 있다. 이렇게 밖은 초겨울 냉기가 서슬이 퍼렇지만, 토론이 열리는 실내는 열기로 후끈한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쏟아내는 자신의 의견을 보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리고 자기와 의견이 달라도 끝까지 경청하고 객관적인 논리와 근거로 감정을 섞지 않은 채 상대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은 차가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독서학교 아이들! 지난 삼월에 시작해 일 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 성숙해 가는 모습이 대견하다. 아직 여물지 않은 중학생반과 다듬어진 모습을 보이는 고등학생반을 보며 성장이란 이런 것이 구나 원숙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고 아무리 귀한 옥이라도 쪼고 다듬는 장인의 노력이 없이는 그 진가를 논할 수 없다. 닦고 다듬어 온전치 못한 것을 온전하게 하고 미성숙한 자신을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학습이고 교육이다.
모두 보물섬이라고 부르는 남해!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돼가는 상황에 아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예쁜 존재이다. 그 소중한 보물들이 독서학교 캠프장에서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 앞날을 밝게 한다.
전날 저녁 아이들은 조별 토론 주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의견을 정해 토론 시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는 생각 모으기를 하고 예선 대회를 가졌다. 조별 토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제에 관한 다양한 근거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상대의 반론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준비과정의 숨결을 느끼며 교육의 방법론에서 많은 변화가 필요함을 알게 된다. 이제 주입식, 암기식, 문제 풀이식 방법으로 학습 할 시기는 지났다. 주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요구하는 프로젝터 학습과 공동의 사고로 문제를 해결하는 토의토론 학습이 우세함을 말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나라 조교의 말이 생각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학생들이 모인 이 학교에서 필기시험에 한국 학생을 능가할 다른 나라 학생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협의와 토론 학습 시에 한국 학생들의 참여도는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등학교까지 우리의 학습이 보여준 한계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하고 이겨낸다고 한다. 그때 생각한 것이 바로 교육현장에서도 토의토론과 모두가 참여하는 프로젝터학습이었다. 이런 작은 바람이 독서캠프 토론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배움 중심의 프로젝터학습의 바른 방법이 아닐까 하며 이런 진행방식이 바로 보물섬남해독서학교의 주말 수업의 강점이라 하겠다.
한 해 동안 걸어온 독서학교의 징검다리를 돌아본다. 어떤 일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한 달에 두 번 주말에 출석해 글쓰기와 토론을 원하는 아이들을 선발했다. 운영위원과 해당 학년 지도교사와의 협의를 거쳐 일 년 동안 섭렵해야 할 필독서를 정하고 입학식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계획대로 실행이 안 되는 일이 현실이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 공부, 시험, 주말 행사 등으로 빠졌으며 해당 도서도 읽지 못하고 참석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럴 땐 언제나 스스로 원해서 지원한 만큼 자신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말자는 약속으로 다잡았다. 그리고 운영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의 수고도 생각난다. 모두 자기 일이 있으면서 오직 열정과 기쁨으로 주말 시간을 반납하고 참가했다. 그 고귀한 헌신은 생각만 해도 고개가 숙어진다. 한 술 더 보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주고자 화전도서관에서 공모사업으로 시행한 길 위의 인문학 강좌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칠월에 찾아간 군산 문학기행, 시월에 찾은 평사리 황금빛 무듬이 들판 등 독서학교의 짧은 여정이 아이들에게는 삶아있는 경험으로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한 해 동안 자신의 흔적을 글로써 남기는 교지 작업과 수료식이다. “저 많이 빠졌는데 수료 가능해요?” 라고 묻는다. 그럴 때 언제나 자신의 선택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독서캠프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교직을 떠나 운영진으로 계신 선생님의 웨스트라이프의 유례 이즈미 업(You Raise Me Up)을 반주 없이 열창으로 선물하신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폭풍의 바다고 건널 수 있다.’는 노랫말처럼 보물섬독서학교가 있기에 우리 아이들의 앞날도 환하다.
그 희망의 출발은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고 ‘왜’라는 생각으로 내공을 쌓는 것이다. 독서학교 아이들! 내년에는 더 성장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