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SBS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가 끝났다. 2월 20일 화요일에 1~4회를 연속 방송한 이례적인 편성이었다. 1월 30일 전작 ‘의문의 일승’ 종영 3주 만에 후속드라마 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다름 아닌 평창동계올림픽 중계로 인한 변칙 방송이었다. 당초 32부작(옛 16부작)에서 40부작으로 늘어난 것도 마찬가지다.
‘키스 먼저 할까요?’는 ‘리얼 어른 멜로’를 표방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드라마를 봐오면서 처음 들어보는 ‘리얼 어른 멜로’이다. 분명한 것은 손무한(감우성)과 안순진(김선아) 남녀 주인공이 40대 중년이라는 사실이다. ‘중년드라마’라는 수식이 나오는 이유다. 어느 신문은 ‘중년드라마의 열기’(조선일보, 2018.3.30.)라고까지 말한다.
이른바 중년드라마는 김남주와 지진희 주연의 ‘미스티’(JTBC), 한혜진의 4년 만의 복귀작 ‘손 꼭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MBC) 등이다. 유동근과 장미희가 60대 로맨스를 연기하는 ‘같이 살래요’(KBS 2TV)도 끼워주지 않으면 서운해 할 법하다. 글쎄 그 정도로 ‘열기’일지 의문이지만, ‘라디오 로맨스’(KBS 2TV)와 ‘위대한 유혹자’(MBC) 등 청춘을 내세운 드라마들이 2~3%대의 저조한 시청률을 보인 건 사실이다.
이에 반해 ‘키스 먼저 할까요?’는 사실상 첫회 후반부(2회)가 10.5%(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의 두 자릿 수 시청률로 순조롭게 출발했다. 두 자릿 수 시청률이 방송 내내 이어진 건 아니다. 최종회마저 9.1%에 그쳤다. 마지막 방송 시청률이 올라가는 일반적 경향과 다른 모습이었지만, 탄탄한 고정 팬들의 지지를 받은 리얼 어른 멜로 ‘키스 먼저 할까요?’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런 드라마의 중년화에 대해 김공숙 안동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는 앞의 신문에서 “유튜브나 네이버 클립 영상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긴 호흡의 TV 드라마를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며 “결국 TV 앞에 남게 되는 중년층을 겨냥한 멜로물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드라마 PD도 “광고의 기준이 되는 지표는 시청률이기 때문에 중년 겨냥 드라마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키스 먼저 할까요?’가 확실히 보여준 것은 어려운 중년남녀의 사랑하기다. SBS ‘끝에서 두 번째 사랑’(2016) 등에서 그 어려움을 이미 보았지만, ‘키스 먼저 할까요?’의 무한과 순진의 사랑하기는 더 어렵다. 무한이 순진의 딸을 죽게한 과자의 광고 제작자로 얽혀 있어서다. 초반 코믹모드가 진지하고 심각한 사회성으로 흘러가는 지점이다. 가볍고 유쾌한 즐길거리를 기대한 시청자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안겨주는 흐름이기도 한다.
말기암 시한부 환자라는 설정이 순진에겐 사랑의 힘으로 작용한다. 죽은 딸에 대한 죄책감과 무한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40대 중반 여성의 현실적 삶과 심리를 비교적 밀도감 있게 잘 그려낸 점도 평가받을만하다. 무한을 죽이지 않은 결말로 시한부 환자라는 캐릭터의 식상함을 극복한 것도 좋아 보인다.
46세 중년 여성의 “당신(무한-인용자) 보기만 해도 설레는” 사랑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낸 리얼 어른 멜로답다고 할까. 리얼한 것은 더 있다. “10년 동안 남자랑 한 번도 안잤다고요. 우리 잘래요? 같이.”나 “너 안서냐?” 따위 대사라든가 알몸 노출 등이 그것이다. 7⋅9⋅11⋅15회 등 부분적 19세 시청가였던, ‘애들은 가라’의 리얼 어른 멜로인 셈이다.
아쉬움도 있다. 우선 죽어가는 무한을 집에 놔둔 채 학원강사 나가는 순진(39회)이 상식적인가? 10대이면서도 안하무인격 갑질을 하던 손이든(정다빈)이 바리스타 여하민(기도훈)에게 반한 후 180도 변신하는 캐릭터 역시 좀 그렇다. 그런 점은 순진의 절친 이미라(예지원)의 폐경을 못받아 들이는 등 여러 호들갑스러움도 마찬가지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건 오류의 대사다. 가령 ‘깨끗이’를 ‘깨끄시’가 아닌 ‘깨끄치’로 발음해 눈살을 찌뿌리게 하고 있다. 감우성과 박시연(백지민 역) 등 주⋅조연을 막론한 오류인 걸 보면 대본의 문제이지 싶다. 15회(3월 13일)에서 감우성은 ‘연꼬츠’로 발음해야 할 ‘연꽃의’도 ‘연꼬스’로 말하는 반면 김선아는 ‘연꽃이’를 ‘연꼬치’로 맞게 구사해 대조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