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이 깃든 용정시와 명동촌에서 분노

2018.08.23 14:22:07

2018 통일리더캠프 북중국경에서 통일을 꿈꾸다 <3편>

새벽 4시경 연길 시내에서 눈을 뜬다. 어젯밤 부루하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화려한 조명은 안개비에 잠겨있다. 연길이라는 지명은 연기가 모이는 모습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은 고위도의 분지 지역이어서 일찍이 팔월이면 농사일을 끝내고 긴 겨울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구월이면 난방을 하는데 집의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남아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부루하터란 강 이름도 만주족의 언어라고 한다. 연길을 포함한 간도 지역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성지라 신성시하여 봉금령으로 다스려졌다고 한다.


어제는 내리는 비에 두만강 푸른 물을 보지 못해 야속했다. 희붐하게 밝아 오는 연길의 새벽을 보며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사흘째 일정을 시작한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도와주지 않는 날씨를 탓하기엔 일정이 빼곡하다. 혼자의 푸념을 거두며 연변박물관으로 향한다. 박물관은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다. 검색대를 통과하여 1층으로 들어선다. 1, 2층은 한민족관으로 이주한 역사부터 시작하여 최근 자치주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의식주와 관혼상제의 의식에서 우리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한민족의 문화 원조를 볼 수 있다. 3층은 중국의 근현대사와 관련지어 청나라가 멸망하고 일제의 침략에 대응한 항일투쟁과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석기시대부터 출토된 유물과 발해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특히 남북국시대 발해국 3대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의 무덤이 인상 깊다. 이 무덤은 모줄임 천장구조의 굴식돌방무덤이다. 연변박물관 탐방을 통하여 소수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이 같은 뿌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타의든 자의든 삶의 터전을 찾아 연변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슬픈 역사를 대하니 가슴이 짠해진다.


오후가 되자 비는 잦아지고 흐린 날씨가 된다. 이번에는 길림성 연변 자치주 용정시로 방향을 잡는다. 용정 하면 떠올린 것이 명동촌의 시인 윤동주와 조두남 작곡 윤해영 작사의 선구자 노래이다. 개인적으로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2부에서 조준구를 피해 서희와 길상이 용정에서 터를 잡고 생활하는 내용과 연관된다.


용정이란 이름은 거룡우호공원 안에 있는 작은 우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여진족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한족과 조선족 이민자 등 오가는 길손이 많아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지자 1879년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 우물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이곳 이름도 용두레 촌으로 후에 용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버스는 용정 시내를 거쳐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으로 향한다. 이곳 동북 3성의 작물은 대부분 옥수수인데 용정과 명동촌 가는 길에는 벼가 자라고 있으며 사과배나무도 유명하다. 기후상으로 벼를 재배하기 어려운 지역인데도 이민 온 조선 농민들은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개량을 거쳐 오늘에 벼를 재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는 도중 일송정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하지만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일송정 하면 정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비암산 바위벼랑에 두 아름이나 넘는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돌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모습처럼 보여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용정 시내와 해란강을 굽어볼 수 있으며 많은 애국지사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 고개에서 모여 독립의 마음을 모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정에 설치된 일본 간도 파출소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일제는 소나무를 사격표적지로 사용하고 그래도 죽지 않자 줄기에 구멍을 뚫어 후춧가루를 넣어 고사 시켰다고 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항일독립운동의 마음을 모은 애국지사들이 투영된다.


용정시에서 윤동주가 나고 자란 명동촌까지는 15㎞다. 선바위를 지나 장재촌을 지나면 명동촌이 나타난다. 명동은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동쪽은 바로 우리나라를 말한다. 명동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윤동주는 소학교 때부터 시를 썼다. 시를 통해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명동촌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늑하고 포근한 마을이다. 19세기 1990년대 이전만 해도 이 수림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한 한적한 고장이었다. 하지만 1885년을 계기로 청나라에서 200여 년간이나 지속한 봉금령이 폐지되자 기아에 허덕이던 조선 북부지대의 농민들이 명동지구에 밀려들었다. 그리고 1899년 2월 18일에 두만강 남쪽의 회령, 종성 등지에서 윤동주의 외숙부 김약연 등 네 학자 가문의 남녀노소 141명이 명동 일대에 이주해 와서 생긴 마을이 명동촌이다.

 

동북으로 완만한 호선형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둘러있고 그 서북단에는 선바위란 삼형제바위들이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서북풍을 막아주고 있다. 그 바위 돌 뒤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가기 전 사격연습을 하였다 한다. 이 삼형제바위는 명동촌 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동쪽에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캐 령인 오봉산과 살 바위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정면에는 고산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 간다.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 학교 옛터 앞에 섰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낭랑한 시인의 목소리가 금방 들려올 것 같다. 명동 학교 교실로 들어간다. 복도를 지나 교실을 열어 보니 시인이 앉아 있다. 물론 모형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일본의 만행에 숨져간 시인을 다룬 영화 ‘동주’와 겹치어 일제에 대한 분노가 붉은 물결을 이룬다.  명동 학교를 뒤로 시인의 생가로 옮긴다. 길섶에 핀 붉은 백일홍은 피를 토하여 마지막을 보낸 시인의 고통이 물들었을까? 꽃을 보아도 예쁜지 모르겠다. 시인의 생가를 알리는 표지석엔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 새겨져 있다. 입장하니 명동교회와 우물, 비슬나무아래 정자 속에 윤동주의 외숙인 김약연의 하얀 공덕비가 눈에 들어온다. 마당에는 철 이른 코스모스가 분홍, 하양, 빨강으로 녹색에 대비되어 살랑거리고 가장자리에는 돌을 잘라 만든 면에 주옥같은 시인의 시가 각인되어 있다. 한 행 한 행을 읽으며 어둡고 불우했던 시절 시인의 투명하고 맑은 서정을 헤아려본다.


시인 생가 마루를 쓰다듬고 다시 발길을 입구로 향하다 아쉬움에 고개를 돌린다. 생가 기와지붕 뒤로 장재마을로 접어드는 선바위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송몽규와 함께 자라고 문익환 목사와 같이 공부하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을 얼마 남기지 않고 꽃다운 나이에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유명을 달리한 천재 시인. 그 아쉬운 한을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으랴? 시간이 있다면 명동촌과 장재촌을 트레킹하며 시인의 흔적을 찾고 싶다.


다시 명동촌을 벗어나 장재촌  선바위 옆을 지나며 선바위에 올라 고향 땅 바라보는 소년 윤동주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이게 무슨 말인가? 시인은 별 헤는 밤에서 이곳 소녀들을 패(佩), 경(鏡), 옥(玉)으로 불렀다. 이것으로 봐서도 시인은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 아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이미 만주 간도 땅 일대에서 펼친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을 중국 조선족 항일운동사에 포함하고 있다.


용정 시내를 벗어나는 용문교를 건너며 선구자 노래를 떠올린다.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이다. 음악 교과서에도 실리고 널리 애창된 노래였지만 작곡자 작사자가 친일과 연관 있다 하여 시들해졌다. 조선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용정촌의 일송정에서 해란강을 굽어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짐하고 다짐했을 독립투사들.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중국 속의 변방 연변과 용정시 그리고 명동촌 윤동주 생가를 보며 우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동북 3성과 중국 곳곳에서 벌어진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물어본다. 사회와 국사 시간을 통해 역사를 배웠지만,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한 언급은 깊지 못했으며 암기식으로 학습하였기 때문에 쉽게 잊혀졌다. 또한 역사 교과의 진술도 기득권을 차지한 위정자들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알게 모르게 편향되기도 하였다. 역사란 있는 그대로를 살펴서 현재를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무한한 역사의 흐름 속에 일각도 안 되는 인간의 욕심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야망에 의하여 오도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바른 진술 위에 해석은 각자에게 맡겨야 한다. 정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인의 마음으로 역사를 봐야 할 것이다.

장현재 경남 해양초 교사 qwe85a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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