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공연계, 특히 뮤지컬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행공식이 우스개처럼 떠돌았다. 남자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갈 것, 주인공 다음의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 배역들 역시 남자로 설정할 것. 둘 또는 셋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설정할 것. 아닌 게 아니라 한동안 대학로는 ‘남자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남성 출연진, 남성 제작진으로 꾸려진 무대가 주를 이뤘다. 아마 위의 우스갯소리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누군가 던진 뼈있는 농담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서사’에 대한 목마름이 높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차츰 여성들의 무대를 요구하는 관객들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덕분에 최근 1~2년 사이 여성들에 의한, 여성들을 위한 작품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 출연진이 여성 배우로만 꾸려진 뮤지컬도 등장했다. 이번 가을에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전 출연진이 여성 ‘베르나르다 알바’
뮤지컬에 출연하는 10명의 모든 배우가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간 전 출연자가 남자인 극은 많았으나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전무(全無)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덕분에 캐스팅 발표와 동시에 단숨에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작품은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뮤지컬로 각색한 것.
이야기는 1930년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농가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남편을 여의었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집안을 이끌어가는 여성 가장 베르나르다 알바는 노모와 다섯 딸들을 권위적이고 강압적으로 통솔한다. 겉보기에 평온하게 보이는 그의 집이지만 가족들은 각자의 정열적인 감정들에 의해 시기하고 대립하며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단조롭고 숨 막히는 공간 속에서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의 욕망을 갈구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는 스페인 남부의 전통 무용인 플라멩코의 정열적인 몸짓으로 표현된다. 배우 정영주는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여배우 10명만 나오는 공연은 처음이라 배우들 나름대로 사명감이 있다”며 “젠더의 이야기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만큼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겠다”고 남다른 각오를 내비추고 있다.
중년의 고민 유쾌하게 푼 ‘메노포즈’
백화점 란제리 세일 코너에서 우연히 만난 네 명의 여자. 속옷 하나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던 이들은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둘 털어놓게 되고, 의도치 않게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바로 폐경이라는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 성격도, 처한 환경도 전혀 다른 이들은 기억력 감퇴, 홍조, 오한, 호르몬 이상 등 폐경으로 인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힘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작품의 제목인 ‘메노포즈’는 폐경 또는 폐경기라는 뜻으로, 뮤지컬을 통해 중년 여성들의 고민을 밝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작품은 2001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래 미국 450개 이상의 도시와 전 세계 15개국에서 공연될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는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여성들만의 고민거리를 툭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폐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한 몫을 해냈기 때문.
뮤지컬에는 1960~1980년대 히트송을 편곡한 넘버들이 흘러나와 흥을 더한다. ‘Only you’, ‘YMCA’, ‘Stayin’ alive’, ‘What’s love got to do it’, ‘New attitude’, ‘Lion sleeps tonight’ 등 국민팝송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는 팝송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번 공연에는 무대와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지금 가장 활발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돼 기대감을 더한다.
배우 이경미, 김선경, 홍지민, 문희경, 박준면, 신효범, 조혜련, 황석정 등이 전성기만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한물 간 배우, 사회적인 성공에도 외로움과 건망증으로 괴로운 전문직 여성, 여성 호르몬의 이상으로 힘들어하는 주부 등 각기 다른 성격의 여성 네 명을 연기할 예정이다.
<베르나르다 알바>
10월 24일–11월 12일 |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 02-391-8226
<메노포즈>
11월 27일-2019년 1월 20일 | 광림아트센터 | BBCH홀 | 1577-3363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