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정성으로 되찾은 국보 <세한도>

2019.03.14 15:13:06

조정육의 <좋은 그림 좋은 생각>

그림 한 잔, 생각 한 접시

 

명작을 소개 받는 기쁨,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내밀하고 소소한 충만함이 좋은 책이다. 옆집에 사는 아줌마 같이, 어디서 만난 듯한 소박한 글 속에 담긴 따듯한 언어들이 부담 없이 읽혀지는 책이라서 좋다. 조정육 작가는 처음 만나더라도 화장기 없이, 맨발을 보여줘도 좋을 것만 같은, 친구로 삼고 싶은, 속사람과 겉사람이 같은 투명함이 좋아 자주 찾는 작가다. 마치 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1학년 아이들처럼 맑은 하늘 같아서 좋다.

 

나에게 친구란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한두 마디만 나눠보면 금방 드러나고 마는 허약한 내면은 참아줄 수 있으나 계산적이거나 투명하지 못함은 견디지 못한다. 사실은 내가 부족하니 나를 채워주지 못하는 만남을 못 견딤이리라.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용당하기 싫은 것이리라. 아무리 오랜 시간 곁을 내준 친구라 하더라도 결정적인 말로 상처를 준 친구라면 아무 미련 없이 가까이 하지 않는 못된 성미를 버리지 못하고 이 나이를 먹어서 부끄럽지만 고칠 생각은 없다.

 

말이란 결코 주워 담을 수 없으며 내뱉은 말 속에 숨겨진 진심은 빙산의 일각처럼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모습이니 결코 말실수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삶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술김에 내뱉는 말 속에 뼈를 감추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으니 관리자나 선생님들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적인 위치나 공적인 위치를 따지지 않고 술에 취해 내면을 들키지 않은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으니.

 

나는 술을 먹지 못해서 회식 자리가 고통스러웠던 적이 참 많았다. 대놓고 싫어하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장 선생님은 다 좋은데 술을 안 먹는 게 싫다"거나 "술도 따라주지 않으니 기분 나쁘다" 는 말이었다. 여타의 직장에 비해 품격이 좀 더 낫다고 여겨지는 학교라는 직장이 그럴진대 다른 곳은 어떨지. 그러니 술을 먹어야 하는 회식 자리에서 자주 체하고 배탈이 나곤 했다. 교직에 머무는 동안 그런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은 덕분에 술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그런 자리가 없어진 것은 최근 몇 년이니 참으로 오랜 세월 잘 견뎠다. 거기다 술에 취해 아무렇지 않게 은근슬쩍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가까운 작태를 보는 것도 심심찮게 일어났으니 학교라는 직장생활도 결코 만만한 일터가 아니었다. 맨 정신으로 그런 작태를 보이는 상사들도 없지 않았으니 나는 그들을 경멸했고 학교를 욕보이는 사람들로 치부하며 되도록 멀리 했다. 때론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따돌림이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바꾸진 않았다.

 

요즘에야 그러한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등장하여 많이 맑아지고 있으니 그나마 조심하는 모습들이 보여서 늦었지만 다행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소중하며 귀한 존재라는 것, 일하는 자리에 따라 하는 역할이 다를 뿐, 높거나 낮은 사람은 없다는 인권의식이 기반이 되지 않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비교육적인 곳이며 비인간적인 곳이 분명하다. 면박을 주거나 무시당한 기억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한 나를 귀하게 여겨준 사람도 결코 잊혀지지 않으니 삼가고 또 삼가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너무나 점잖은 관리자나 동료 직원이 술만 들어가면 거칠고 형편없는 언어를 남발하거나 곤란한 태도를 보여서 인간적인 신뢰감이 떨어지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술에 취했을 때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은 본래 언행이 바른 사람이 분명해서 존경하게 된다. 혼자 있을 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진면목이듯, 술은 인간성을 재는 잣대로 보아도 결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랜 경험으로 봐서 그렇다.

 

얼굴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face의 어원이 가면(Persona)인 걸 보면 인간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런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하는 술이 들어가면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술을 먹고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때 하는 말이나 행동에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대기업에서는 일정 수준의 상위 임원을 발탁하기 전에 반드시 술자리 매너를 본다고 한다. 덧붙여 돈 관리를 잘하는지, 가정적으로, 이성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한자리에서 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술자리 매너라는 것.

 

이 책의 소박하고 진솔함은 마치 술에 취해서도 전혀 부끄러운 내면이 없는 투명하고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글이 전편에 흐른다. 그럼에도 그림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인 작가가 그처럼 겸손할 수 있는지,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모습이 매우 인간적이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없다면, 아픔을 드러낼 수 없다면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 책에는 작가의 아프고 시린 자식 이야기를 비롯해서 개인적인 부끄러움도 낱낱이 드러나는 글들이 많다. 자기 자신은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독자를 내려다보는 듯한 글을 읽으면 시간이 아깝다.

 

지극한 정성으로 구한 국보 <세한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세한도에 얽힌 일화다. 교육의 다른 이름은 '정성'이며 인생의 레시피도 '정성'이다. '지성이면 감천'은 영원한 진리임을 보여주는 실화라서 소개해 올린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여름, 서예가이자 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은 김정희의 <세한도>가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넘어간 것을 알고 애가 탔다. 전쟁 중이라 만약 그가 일본으로 떠나버리면 영영 <세한도>를 되찾을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 있는 후지쓰카 집을 찾아 예의를 갖춘 다음, "값은 얼마든지 쳐 드릴 테니, <세한도>를 넘겨 주시라" 제안했다. 당시 김정희 연구에 빠져 있던 후지쓰카는 자신도 추사를 존경하므로 넘길 수 없다고 손재형의 제안을거절했다.

 

후지쓰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국보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 것을 안 손재형은 1944년 여름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절하는 후지쓰카를 찾아 두어 달 동안 날마다 찾아가 부탁했다. 그러자 노환으로 누워 있던 그가 손재형의 정성에 감복하여 제안을 했다.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넘겨주라고 아들에게 유언할 테니 안심하고 귀국하라고.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손재형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세한도>를 넘겨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비가 아끼던 물건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손재형의 정성 덕분에 <세한도>가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들고 귀국한 후 석 달쯤 지나서 후지쓰카의 서재는 폭격으로 전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세한도>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셈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팔지 않겠다던 후지쓰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닌 정성이었다. 그 기적은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정성과 진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믿기만 한다면. -119~120쪽

 

이 책에는 많은 편수의 동양화가 등장한다. 중국이나 일본 작가의 작품도 등장한다. 작가가 설정한 주제와 어울리는 작품을 소개하고 자신의 일상을 곁들인 글과 그림을잘  버무려 맛깔스런 백자 접시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깔끔하다. 비록 훌륭한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좋은 그림에 굶주린 나같은 사람에겐 그마저도 행복한 정경을 안겨준다. 거기다 작품을 설명하는 문장은 철학적이고 곁들인 생각은 더욱 깊다.

 

진심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교는 없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기교다. 최고눈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그것이 목쇠리든 얼굴이든 상관없다.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다.-184쪽

 

글과 그림은 한 뿌리에서 발원한다. 그것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글도 그림도 그릴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삶에 대한 그리움, 자연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 한 번뿐인 유한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다. 살다간 그림자를 남기고 싶어서 기록을 남기고 조각을 하고 노래를 만들고, 몸으로 표현하는 춤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리움으로 살아간다. 그 그리움이 사라지는 날이 숨을 쉬지 못하는 순간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그리움 것들을 찾아  산책로를 지나 도서관에 간다.

 

어디선가 노랑 옷을 입은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을 부르며 골목길 모퉁이에서 튀어 나올 것만 같은 그리움에 코끝이 찡해온다. 벌써 중간놀이 시간이겠구나! 그리움이 눈물샘으로 오른다.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초봄의 하늘이 1학년 귀염둥이처럼 해맑다. 봄이 오고 있구나!

장옥순/수필가/시조시인/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외 다수 jos2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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