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시학관에서 문교부장관에 오른 ‘꺼삐딴 리’

2019.10.22 09:03:40

⑮고광만(高光萬, 1904~미상)

히로시마고등사범 출신으로 뼛속까지 친일파
해방 이후 지탄 받았지만 눈부신 영전 거듭
미 군정, 이승만·박정희 정권까지 승승장구
한국 근현대교육에 반성적 성찰 계기 삼아야

 

1947년 3월 하순 충북 청주에서 도학무국장에 대한 불신임건의안이 청주의 각 초‧중학교 교원 명의로 도군정장관에게 제출됐다. 불신임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고광만 충북도 학무국장은 일제 시에 조선총독부 시학관과 충주공립중학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일본천황의 소위 ‘교육칙어’를 라디오를 통해 해설했고 조선동포와의 면담에는 통역을 필요로 했다는 등 황민화교육에 충성을 다한 친일파다. 2. 작년 2월 청주중학교 세 교원을 무고 파면하야 교육계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고 금반에는 네 중학교에 대하여 휴교령이라는 비민주적 조치로 중등교육계를 파괴하였다. 3. 이상으로 충북도 교육계의 파괴를 초래한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 고광만 국장에게 있는 것이며 미군정을 훼손하는 것이니 청주시내 교원 일동은 서명 날인하야 이에 불신임함.”(‘독립신보’ 제291호, 1947. 3. 29)
 

이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은 1947년 2월 청주에서 일어난 국대안반대 맹휴였다. 학무국장 고광만은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 청주사범에 대해 전교원 무고강제사직권고와 무조건휴교령을 발령하고 청주중학, 청주농업, 청주상업 세 학교에 대해 무조건휴교령을 내렸다. 위의 불신임건의안은 그에 대한 교원들의 항의 표시였다. 
 

고광만은 해방 직후에도 물의를 일으켰던 충북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해방 당시 충주중 교장이었다. 일제시대에 조선인이 공립학교 교장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더구나 공립중에서는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교장 지위 자체가 이례적일 수밖에 없다. 승진 배경에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자라는 보기 드문 학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승진을 가능케 한 요인은 단지 고급 학력만은 아니었다.
 

일제 말기 그의 이름은 ‘고광만’(高光萬)이 아니라 ‘다카미네 히로미쓰’(高峰啓光)였다. 그는 충주중 교장 당시 조선인 학부모가 찾아오면 자녀 학생에게 통역을 시켜 일본 말로 대화했으며 집에서도 일본식 복장인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고 지냈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전설적인 친일 인물이었다. 교장으로 임명되기 전에는 조선총독부학무국의 시학관으로 일했고 라디오방송에서 ‘교육에 관한 칙어’를 해설한 적도 있으니, 일상생활에서조차 드러나는 그의 친일 행적은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 매우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것이었다고 봐야 하며 그것이 고급 학력 못지않게 그의 ‘출세’를 가능케 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이런 전설적 친일 인물의 행태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충주중 조선인 학생들이 해방 이후 그대로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학생들에게 배척 당하고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다카미네 교장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알겠다. 내 자신의 과오에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 점 사과한다. 다만 지금 내가 그만두면 당장 학교 운영이 공백 상태가 된다. 일본인 아래서는 학교 관리에 열심히 임했다가 해방된 지금 이 시점에 그만두면 이중으로 민족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후임자가 올 때까지 인계 준비를 하면서 학교를 지키겠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나도 조선 사람이며 일본인 교사가 다수파인 학교에서 고충이 많았다. 그러나 변명 삼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제군들도 나중에 사회생활을 해보면 얼마쯤 그 고충이 이해가 될 것이다.”(유종호, ‘나의 해방전후, 1940〜1949’, 2004)라며 공개 사과했다. 
 

 

학생들은 일단 수긍하고 후임 교장의 부임을 기다리기로 했지만, 이후 사태는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난날의 다카미네 히로미쓰는 해방 후 다시 고광만이 돼 미군정 하에서 충청북도 학무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학생과 교사들의 반대 운동이 거세지자 이번에는 오히려 역공으로 돌아섰다. 반대운동의 중심이었던 청주중 교사 3인을 좌익이라는 이유로 파면했으며 그에 반대하는 중등학교 학생들의 맹휴가 이어지자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다 결국 합의를 파기했다. 2차 맹휴가 이어지자 주동학생을 체포하고 3인 교사 파면을 강행하는 등 파동이 이어졌는데 모두 학무국장 고광만에 대한 반대였다.
 

불신임건의안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후 대학 쪽으로 활동 영역을 바꾼다. 충북 학무국장을 떠나 대구사범대 학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이력을 보면 줄곧 비단길이자 눈부신 영전의 연속이다. 다만 1948년 대한민국 입법위원 후보 심사 결과에서 그의 인준이 부결된 것이 이력에서 유일한 흠결이었다고나 할까. 
 

1950년 2월에는 서울대 사범대 학장으로 옮겨갔다. 우리나라 최고 교원양성기관의 수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1952년에는 교환교수로 유학차 미국에 갔고 귀국 후 다시 사범대 학장으로 복귀했으며 1956년 6월에는 문교부차관으로 임명돼 이승만 정권 내각 안으로 들어갔다. 차관을 물러난 후에도 화려한 경력은 계속 이어진다. 4월 혁명 직전인 1960년 3월에는 국립경북대 총장으로 다시 교육기관의 수장에 컴백한다.
 

그러나 교육계에 머무르기에 그의 정치적 야심은 너무 컸던 것일까. 이번에는 직접 정계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1960년 7월 그는 일간신문에 ‘교육전선을 떠남에 제하여’라는 제목의 출사표를 광고로 실으며 참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본인은 삼십삼성상의 꾸준한 교육생활에서 떠나려합니다. 사월혁명에서 젊은 학도의 붉은 피를 본 나는 새로운 사명이 나에게 주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치가 부패하고 문화가 후퇴하고 경제가 몰락하여가는 이 딱한 민족의 터전이 송두리째 썩어 터지려할 때 우리 교육이 길러낸 젊은 우리의 학도들에게 삼일정신의 피냄새를 맡을 줄 모르는 둔물들이라고 질책하였던 것입니다.…(중략)…이들 젊은 영웅들의 피를 이 이상 더 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겠느냐고. 여기에 결심한 바 있어 참의원 의원에 입후보하여 의정단성에서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한 입법활동에 내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 것입니다.”(‘동아일보’ 1960. 7. 1. 광고)
 

전설적인 친일 활동으로 해방 이후 교사와 학생들에게 지탄 당했던 그 인물이 ‘삼일정신의 피냄새’ 운운하는 대목이나 불과 4년 전에 문교부차관으로서 그 권력의 일부를 이뤘던 바로 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사월혁명’의 학생들에 대해 새삼스레 영웅 운운하고 치켜세우며 자신의 출마를 정당화하는 대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참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신흥 권력에 가담하기로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그는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며 정책부의장을 맡았다. 이런 배경을 발판으로 마침내 1963년 12월 문교부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194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에서 출발한 교육관료로서의 이력이 최고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었다.
 

 

다섯 달도 채우지 못하고 장관직에서 조기 하차했지만 이후에도 국립부산대 총장(1967년), 국회의원선거 출마(1969년, 낙선), 경향신문사 회장(1969년) 등 나름 화려한 이력을 유지하다 1970년대 말 미국으로 도미했다. 언론을 통해 확인 가능한 그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1981년 1월 전두환 방미 당시 LA교민회 주최 환영회에서 그가 교민 대표로 나서 환영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건 예외 없이 늘 권력 쪽에 몸을 두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청,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그의 충성 대상은 마침내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진 것일까. 
 

고광만의 기민한 변신의 이력을 정리해 보면 어떤 소설의 주인공이 저절로 떠오른다. 소설가 전광용의 ‘꺼삐딴 리’(1962년)에서 주인공 의사 이인국은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 북한 소군정 하에서의 친러, 그리고 월남 이후 미군정 하에서의 친미로 능란하게 변신하다 아예 도미를 준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 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시대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달리 하는 고광만의 변신 이력은 ‘꺼삐딴 리’의 그것에 모자람이 없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다만, 고광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도덕적인 포폄으로 일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인국의 말마따나 고광만보다 더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닐뿐더러, 당시로는 보기 드문 그의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수학 경험과 교장으로서 축적한 일제시대의 교육 및 행정 경험이 해방 후 한국교육 전개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를 반면교사로 삼든 아니면 그의 삶에서 취할만한 장점을 찾든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오히려 필자는 그의 삶을 통해 한국 근현대교육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기회를 찾는 편이 보다 의미 있는 일로 믿는다. 예컨대 그의 이력을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일제시대 경력과 활동, 그리고 평판을 모를 리 없었던 해방 이후의 권력자들은 어째서 그를 빈번히 중임한 것일까. 대체 어떤 능력과 경험을 높이 산 것일까.
 

1960년대 초 교육학자 성내운은 이승만 시대의 한국교육에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던 일제 식민지교육의 잔재를 개탄하면서 이렇게 일갈한 바 있다. “일제시대의 교육체제가 한국 사람을 어거지로 일본 사람으로 만들려 했기에 나빴지, 이제 와서 우리는 우리나라를 세웠거늘, 어찌 그토록 힘찬 교육체제를 저버릴까보냐”(성내운, ‘한국교육의 증언’, 1963년). 
 

물론 이 때의 ‘힘찬 교육체제’란 ‘황국의 신민’을 길러내기 위한 장치로서의 식민지 교육 제도와 행정과 관행에 대한 풍자적 표현일 것이며, 그가 지적한 것은 식민지 교육의 잔재가 ‘의도적으로’ 이승만 체제 하에서 유지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권위주의적인 교육 잔재는 박정희 체제 하에서도 근절되지 않았다.
 

식민지교육의 유능하고 충직한 뷰로크라트이자 테크노크라트였던 고광만이 해방 이후의 한국교육에서 그렇게 부활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던 배경에는 그가 갈고 닦아온 식민지 시대의 ‘힘찬 교육체제’의 노하우를 재활용해 당대의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어떤 ‘국민’을 길러내고자 했던 욕망, 그리고 그런 ‘국민’을 기르기 위한 교육제도와 행정, 관행을 유지하고 복제하고 재생산하고자 했던 거대한 욕망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방된 지 70년의 성상이 흐른 지금 고광만이라는 한 교육자의 이력을 다시 들춰 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한국 근현대교육에 대한 새로운 반성적 성찰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다. 오성철 서울교대 교수

오성철 서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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