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슈] ‘공정한 교육’을 갈망하는 당신에게

2019.11.05 10:30:00

저요? ‘공정(公正)’이라고 합니다. ‘공정’에도 형제자매가 많습니다. 요즘 어디에나 필요하고 핫한 화두이니까요. 최근 ‘기회의 공정’을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교육 부문에서의 대표적인 ‘기회의 공정’은 ‘대입제도’라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저를 ‘교육의 공정’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공정은 완벽한 제도 아닌 사회구성원의 합의

 

요즘 저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네요. 수능시험에다 수시니 정시니, ‘학생부종합’이니 ‘학생부교과’니 해서 오만가지 대입제도를 만들어 놓고 ‘공정하다’고 자랑하더니 웬일인가요. 분명 누가 사고 쳤지요? 예전에도 그럴 때만 저를 찾았으니깐. 이번에는 저도 꼭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그동안 가출 청소년처럼 거리를 배회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생활에도 지쳤습니다.

 

우선 저를 데려가려면 세 가지를 약속해 달라고 정중히 요구합니다. 첫째, 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 둘째, 편 가르기를 하지 말 것, 셋째, 일단 데려왔으면 딴소리하지 말 것.

 

저의 필요성을 인정하라는 것은 저의 존재가치에 관한 확인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모두를 위대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 자체로 위대한 것 아닌가요. 고귀한 가치는 모두에게 직접적인 이득을 갖다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고귀한 것 아닌가요. 저도 그런 반열로 대접해 줘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손톱의 때만큼도 존중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실력 발휘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누구 편이냐는 질문도 이제 신물이 납니다. 저를 대할 때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자기에게만 유리한 대답을 기대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편을 가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갈라진 편을 통합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용도를 오해하면 저는 괴롭습니다.

 

한번 데려왔으면 딴소리 말라는 것은 신뢰에 관한 얘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를 100%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는 없습니다. 일단 공론으로 저를 채택했다면 ‘합리적인 차선’으로 믿고 적극 지지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를 다시 거리로 내쫓는다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세 가지 요구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합의’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도 그 자체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불완전한 제도를 신뢰하게 만드는 것은 그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의 규제를 받는 인간입니다. 즉, 공정은 완벽한 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의 합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교육은 토막 내서 갈아 끼우는 부품 아냐

그렇지만 저는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영원히 신뢰받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한국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두 개의 자격증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육평론가이고, 하나는 정치분석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나라에서 예전부터 그리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똑똑하고, 너무나 도도한 국민을 만족시켜야 하니까요. 그런데 요즘 또 하나의 ‘악재’가 생겼습니다.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아야 할 저를 정치가 자꾸 자기 품속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아니, 유혹이 아니라 강압입니다. 정치의 강압은 더욱 노골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겉은 그럴 듯한데 속은 추한, 소위 진영논리 때문입니다. 제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교육을 지금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는 공감하시지요? 그리고 제가 부탁한 세 가지 약속도 지켜주실 거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을 믿고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는 저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여러분과 미래 세대, 그리고 국익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우선 저를 만들고, 기르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국민을 상대로 설득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육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특정 방안을 사회구성원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도록 함으로써 저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달라는 것입니다. ‘공정’은 남이 만든 기성품을 사다가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 구성원이 만들고, 기르고,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국민 스스로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교육문제를 객관화·상대화함으로써 저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과정이자, 저를 비난하려면 본인도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 문제는 가능하면 공개적으로 다뤄 줄 것도 요청합니다. 저는 ‘제도’라는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와 좀 더 떳떳하게 살고 싶습니다. 제가 왜 태어났는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지를 태어나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알려주신다면 제가 조금 실수를 하더라도 미움을 덜 받지 않을까요.

 

국가에 ‘정책’이 있다면 국민에게는 ‘대책’이 있다

저의 존재가치를 ‘대입제도’로만 좁혀서 왜소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입제도만 공정하게 설계하면(‘공정’의 의미는 만인만색이어서 공정한 설계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저를 구현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 엄청난 착각입니다. 교육은 어느 분야보다 시계열적 연계성이 강합니다. 특정 단계만을, 예를 들어 대입제도만을 완벽하게 만든다고 해서, 교육 전체가 잘 굴러갈 수 있을까요. 고교졸업 때까지의 ‘과거의 선택’과 대학 졸업 이후의 ‘미래의 선택’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교육은 토막 내서 부품을 갈아 끼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도 대입제도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그렇게 평가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덧붙여 저는 현재 제 이름을 빙자해 논의하고 있는 대입제도의 개혁, 정시와 수시의 배분, 학생부의 개선 등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부분을 마치 전체인양 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저는 언젠가 또다시 좌절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제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교육 전반에 관해 진지하게 재검토를 해주시기 바랍니다(그렇다고 이 정권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진단은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정권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입시제도를 만들 때의 큰 원칙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입시제도는 ‘사악한 사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를 해서는 안 된다’ ‘××는 기재하지 마라’는 등의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이는 다양성을 강조하는 교육현장과는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국가에 ‘정책’이 있다면 국민에게는 ‘대책’이 있다고 합니다. 사악한 의도를 원천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소수의 악인을 막는 네가티브 방법보다는 선의를 가진 다수의 선택을 넓혀주는 포지티브한 방향으로 제도를 대폭 수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특권 대물림’이 고착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사용하는 것을 ‘경쟁탈출(escape-competition)’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일부는 ‘경쟁탈출’을 넘어 부모의 재력·권력·정보력을 활용해 제도적 허점을 악용하는 ‘경쟁무시’ 전략을 쓸 것이라는 걱정이 많습니다. ‘조국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국 사태’는 백번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누르고 막고 깎는 ‘하향평준화’는 반대합니다. ‘조국 사태’는 봉쇄하되,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요인 때문에 경쟁력과 경제력이 떨어진 지역·계층·학생·학교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주는 ‘상향평준화’를 지지합니다.

 

‘교육의 공정’ 갈망한다면, ‘당신’부터 행동하라

마지막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면 저에게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도 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저는 특히 그렇습니다. 소위 ‘기회의 공정’, 그것도 ‘교육의 공정’을 구현하는 일은 사회적 합의와 제도의 설계, 제도의 적용과 수정, 중간 및 사후 평가 등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시간이 많이 드는 데다 매우 논쟁적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5년마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리더십의 교체를 경험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저의 역할을 기대한다면,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아니, 인내가 필요합니다.

 

정말 마지막 말을 남겨두고 있네요. 여러분, 혹시 ‘교육의 공정’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남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고, 바로 당신부터 저의 기를 살려줄 수 있도록 행동하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는 저의 그림자도 만나기 힘들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태가 온다면 그것은 제가 이 사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버린 것입니다.

심규선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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