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이슈] 경계선의 아이들, 갈 곳이 없다

2020.03.05 10:30:00

뮤지컬 배우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재즈댄스 학원에 덜컥 등록한 적이 있었다. 첫날 학원에 대한 기억. 학원의 모든 벽은 거울.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나의 위치.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 복(사실 재즈댄스 할 때 그렇게 예쁜 의상을 입는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어디를 바라보고 서 있어야 할지는 모르는 어정쩡한 자세. 팔짱을 끼고 있기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기도 애매한 내 팔들. 이런 상태에서 첫 수업이 시작되었고, 그래도 나는 뭔가 열심히 따라 해보려고 애썼는데, 그날 선생님께 들었던 첫 마디는 “김태은 씨~ 탈춤 춰요?” 큰맘 먹고 등록했던 6개월짜리 프로그램에 딱 3번 등원하였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를 외쳤지만, 결국 실속 없는 고집으로 환불 기간도 넘긴 채, 이렇게 태생적 몸치를 극복하고 싶었던 꿈은 저물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아이들

이 기억은 학습부진학생들의 학습 과정을 관찰할 때 자주 오버랩 되는 장면이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서정(가명)이는 초등학교 때와는 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선 순간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인지 직감한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신의 수준을 인지한다.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고 수업시간에 손들어 발표도 해보고, 질문도 해본다. 친구들보다 자신의 대답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서서히 주눅이 들고 있다. 교사들 사이에서 서정이에 대한 평가는 학습 속도가 아주 느린 학생, 향후 도달할 수 있는 학습 결과에 한계가 있어 보이는 학생이다.

 

최근 몇 년간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만나는 학생 중에는 ‘해도 해도 안 되는 학생’들이 발견된다. 처음 볼 때는 그냥 조금 천천히 배우는 학생인 듯싶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이 학생들이 뛰어넘지 못하는 구간이 있음이 확인된다. 해당 학년이 목표로 하는 학습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도 사칙연산은 여전히 난관이고, 한 문단의 핵심 문장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성품이 착하고 온순한 이 학생들은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교실 내에서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간혹 마음속에 분노와 불안이 가득하여 화가 밖으로 표출되는 학생들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ADHD의 여부를 고민하게 된다. 이 학생들은 모두 일상생활에 딱히 문제가 없다. 일상생활에서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지적수준이면 특수교육지원대상 권유를 받는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이다 보니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경계선지능은 지적 지능이 경계선 수준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미국 정신의학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4th, DSM-Ⅳ)(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1994)에서는 ‘경계선 지적 기능’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지능검사 결과 평균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지만, 지적 결손 수준보다는 높아서 평균과 지적 결손의 경계선에 해당된다. 지능지수의 정규분포곡선에서 보면, 표준편차 -1에서 -2에 해당(IQ 71~84)하는 아동들은 13.59%를 차지한다. 표준편차 -2 이하에 해당하는 2.28%와 비교해 보면 약 6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적장애로 분류되는 아동의 6배로 추정돼 상당히 큰 숫자이다(강옥려, 2016).

 

현재 성장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44명의 학습부진학생 중 약 4~6명 정도의 학생들이 경계선지능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학생들은 관찰기록상 암기능력과 인지력·분별력 등이 일반 학생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실 해당 연구에 대한 자문을 받는 과정에서 특수교육전문가들은 연구 참여자 모두를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음을 권유한 바 있다. 학생들의 지능 수준을 파악하고, 학습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다. 원인을 파악해야 그에 맞는 적절한 지원이 가능하다.

 

‘느리게 배워도 괜찮은 환경’ 만들기

그러나 이상과 현실에는 간극이 있고, 이에 다음의 3가지 쟁점이 발생한다. ‘적절한 지원은 무엇인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적절한 무엇이 있는가?’, ‘검사와 지원 중 무엇이 먼저인가?’

 

① 적절한 지원은 무엇인가?

경계선지능의 학생들은 추상적인 개념 이해가 어렵다. 지식을 조직하는데 문제가 있다. 배운 개념이나 전략을 일반화시키지 못한다. 기억력이 부족하다. 주의집중 기간이 짧고, 집중하는 능력이 약하다. 구두로 표현하고 들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동기를 유지하기 어렵다. 사회성과 정서·행동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발생한다(강옥려, 2016, 박현숙, 2018). 이처럼 이들의 특성은 얼마든지 나열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래서 무엇을 도와야 하는가이다.

 

쪼개서 가르쳐야 한다.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수준에서 한 걸음 더 할 수 있는 만큼의 과제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사실 이것을 가장 잘하는 분야는 특수교육인데, 이들은 특수교육을 받을 만큼의 지능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손길이 닿지 않는다. 그런데 계단을 못 오르는 아이들을 위해 세분화해서 가르치고 개별화 교수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특수교육에서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교육에서 이 학생들을 한 명씩 앉혀놓고 가르칠 만큼의 인력·시간·예산이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학생들은 갈 곳이 없다.

 

② 적절한 지원을 위한 무엇이 있는가?

검색창에 경계선지능을 검색하면 많은 심리상담소의 치료 프로그램들(청각 훈련·집중력 훈련·작업 기억 훈련 등)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성장했는지를 밝히거나 경계선지능에서 벗어나 우수한 수준까지 향상된 사례 등을 홍보하는 내용이 쉽게 찾아진다. 비용을 보니 최소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에 이른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학생 중에는 이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 가정형편이 되거나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는 학생들은 없다. 이 학생들의 학부모와 면담을 하면서 만일 당신의 자녀가 학교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면 정말 많이 우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부모들은 자녀가 학교를 잘 다니다 보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국가가 국민의 기초학력을 보장하겠다는 것은「헌법」제31조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기본법」제3조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에서 언급하는 ‘교육받을 권리’ 보장에 대한 의지이다. 이는 선언적 진술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촘촘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경계선지능 전담팀 신설(서울시교육청 보도자료, 2019.09.06.) 방안을 응원한다.

 

몇 해 전 난독증 학생들을 어느 부서가 맡아서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법적으로는 특수교육 판정을 받지 않으면 특수교육을 받을 수 없고, 일반교육에는 난독증 전문가가 없으니 핑퐁이다. 경계가 뚜렷하다는 것이 효율적인 정책을 만드는 데는 필요하겠지만, 선이 뚜렷하다는 것은 사각지대의 함정을 만들어 낸다. 예방의 일환으로 특수교육의 예산이 일반교육으로, 일반교육의 예산이 특수교육으로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③ 검사와 지원 중 무엇이 먼저인가?

경계선지능 학생들을 지원하려면 검사를 해야 하고, 검사를 하고 나면 지원이 연결되어야 한다. 사실 검사를 해서 현황을 파악해야 지원 예산을 확보할 수가 있다고들 하지만, 지능지수의 정규분포곡선에 의해 13.59%는 이미 제시되어 있다. 지원 방법도 없는데 검사를 하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를 두 번 아프게 한다. 그러니 지원 인프라 구축이 우선이다.

 

조심스럽게 학부모 협조를 얻어 지능검사를 실시한 학습부진학생이 있다. 결과는 IQ 86. 다행히(?) 경계선지능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이게 다행인가? 관찰되는 바에 의하면 향후 학습을 지속해 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학생이다. 여기에서 수치상으로 경계선지능 범주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지능이 86이라고 필요치 않은 게 아니라, 지능이 96이라 해도 필요로 하면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경계선지능 학생들을 위한 적절한 지원이라 함은 ‘느리게 배워도 괜찮은 환경’일 것이다.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느린 것이다

학교에는 굳이 경계선지능이라고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천천히 배우는 학생들이 있다.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이 느리다. 또래들하고 노는 것보다 한두 학년 어린 후배들과의 관계가 수월하다. 자기 학년의 학습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실패가 일상이니 화가 난다. 더 늦기 전에 이 학생들의 분노를 잡아주어야 한다. 한번은 미안한 마음(너무 쉬워서 혹시나 자존심 상해할까 걱정되어)으로 쉬운 검사지를 제시한 적이 있는데, 자신이 맞출 수 있는 문제들이 많이 나오니 신이 났다. “선생님~ 이거 좀 더 하면 안 돼요? 재밌는데요?” 그동안에 늘 어렵고 재미없었을 성싶으니 미안했다.

 

해도 해도 안 된다는 것은 참 슬프다. 사실 난 몸치다.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몸치를 극복하지 못했던 상황과 서정이가 학습을 뛰어넘지 못하는 상황은 다를까? 누군가의 말(충남대 김선 교수)처럼 춤을 좀 못 추는 것은 그럴 수 있는데, 학습을 못 따라 가는 것은 그러면 안 되는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재즈댄스 학원에 갔을 때의 바람은 “회원님~ 처음 오셨나 보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서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처음이라 어색하시겠지만 이렇게 해보세요”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몸치가 해결되진 않았을 테지만, 적어도 춤에 대한 아픈 기억은 없었을 것 같다.

김태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수학습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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