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꽃을 보며

2020.06.08 15:05:24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이 된다. 오월과 칠월 사이에 있는 유월은 돌, 개천 이끼가 그렇듯이 비렁마다 찬연한 옥색 융단으로 깊은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서산에 해가 한 발이나 남았다. 길어진 산 그림자는 산을 내려와 논밭을 덮고 노을을 물감처럼 흘린다. 나지막한 산길을 도는 짧은 산책길에 산 밭이 나온다. 수국은 흐드러지게 유월 속에 합창을 하고 수수한 웃음 흘리는 감자꽃과 다섯 장의 꽃잎을 펼친 찔레꽃이 소담스럽다. 여름으로 들어서는 이때 많은 여름꽃을 본다. 그리움이 묻힌 접시꽃, 화려한 양귀비꽃, 앙증스러운 망초꽃, 코끝을 훔쳐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밤꽃, 치자꽃 등이 있다. 모든 꽃에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만 한걸음 느리게 살펴보면 아픔과 슬픔의 사연이 있는 꽃도 많다. 그 사연을 대표하는 유월의 꽃이 감자꽃과 찔레꽃이 아닌가 한다.

 

감자꽃의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이다. 감자는 춘궁기 때 허기를 달래주는 구황작물이었다. 감자가 알이 들고 바람 따라 보리가 물결을 이뤄 누렇게 익어갈 즈음을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먹거리가 귀했던 시절 아이들은 가끔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보리 목을 꺾어다가 그슬려 먹기도 했다. 불김이 스쳐 간 통통한 햇보리 알이 씹히던 그 맛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옷이랑 입에 검댕이 칠을 해 돌아와 어머니에게 야단맞던 기억도 아련하다. 하지만 알이 굵어가는 감자밭은 손을 대지 못했다.

 

감자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순수함이 있다. 엷은 꽃잎은 새색시 같은 수줍음이 묻어나고 꽃술의 아련함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잔잔한 햇살이 저녁노을을 타고 감자밭에 머무르는 시각 꽃은 더 환해진다. 꽃은 언제나 감성에 젖게 하고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감자꽃과 더불어 유월의 꽃은 비탈진 언덕과 돌무더기 사이에 피는 찔레꽃이다. 은은한 향과 더불어 그 새순의 맛은 배고픈 시절 어머니 손맛이지만 따끔한 가시를 숨기고 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찔레꽃 이란 노랫말의 일부이다.

 

찔레꽃을 흔히 들장미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산야 어느 곳에서나 피어나는 꽃이다. 장미가 정원과 온실에서 순탄하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찔레꽃은 비바람과 뙤약볕을 받으며 어느 곳이든지 가리지 않고 흙내음과 바람 속에서 순백의 꽃을 피운다. 녹색이 짙어가는 오뉴월 천지의 산야가 심심하지 않게 녹색에 지치지 않도록 우리의 눈을 환하게 밝혀주고 향기롭게 해주는 꽃이 찔레꽃이다.

 

찔레꽃을 자세히 살펴본다. 작지도 않은 다섯 장의 순백의 꽃잎을 펼쳐 질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은 유난히 흰색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어물리는 토종 꽃이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향기 따라가다 보면 틀림없는 그 근원은 찔레꽃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가난했던 시절 찔레꽃은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탐하기엔 배고픔이 더 절박해서 어린 찔레순을 꺾어 먹던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꽃이다.

 

봄과 여름의 징검 달인 유월, 진초록을 향해 달음질하는 계절이지만 짙은 초록의 물결 속을 살펴보면 천만 가지의 초록으로 넘실거리고 있다. 번데기를 벗고 막 기어 나온 듯 햇빛 속에 꿈틀거리는 붉은 기운이 섞인 연둣빛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파릇파릇, 푸르므레, 푸르초롬, 푸르스레, 프르딩딩하게 제각각 초록의 경연을 펼친다. 산색은 온통 초록 잎새의 향연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럴 때 산길을 걷노라면 새소리도 초록에 맞는 음색으로 화답을 하고 녹색 바람도 신바람의 물결을 이룬다. 조용한 화음이 넘치는 조화로운 유월의 숲속에서 거머쥐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인간의 교양 수준은 자연보다 훨씬 뒤떨어짐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연의 일상 속에서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늘 거슬리려 애를 쓴다.

 

해거름에 나선 발걸음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뒤로한다. 감자꽃, 짤레 꽃은 언제나 단아한 모양새로 시골 처녀 같은 천진하고 아리잠직한 모습을 지녔다. 유월의 노을이 내리는 마을 둘레길 오후의 풍경은 빗살무늬 토기처럼 호젓하다. 우리는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찰나이다. 감자꽃, 찔레꽃 또한 잠깐 피었다 돌아가는 모습으로 보는 이에게 짧은 행복과 감동을 줄 뿐이다.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이다. 부드럽고 조용한 유월, 감자꽃 찔레꽃의 수순함이 모든 이의 마음을 덮었으면 좋겠다.

장현재 경남 해양초 교사 qwe85a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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