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신이 된 왕이 머무는 곳

2020.07.20 09:54:09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서울 사대문 안쪽, 종로 3가쯤 차를 타고 지나다가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종묘는 조용하다. 궁궐처럼 유명한 역사 유적이지만 안내자(주중에는 안내자와 함께 답사할 수 있다)의 설명을 들어야 해서 그런지 궁궐 입구와 같은 시끌벅적함이 없다. 대신 무언가 팽팽한 긴장감이 종묘 입구를, 그리고 종묘의 숲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는 그런 긴장감의 이유를 곧 받아들이곤 한다. 35개 방을 모두 채운 왕(황제)과 왕비(황후)의 위패가 가진 무게감이라면 그 정도 긴장감은 당연하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그 자리에 들어선 왕과 왕비 개인의 이야기를 모두 담는다면 그 무게는 차마 계량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종묘는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해서 이름만은 익숙한 공간이긴 하다. 나라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자주 나오는 대사, ‘종묘사직을 보존하게 하소서’란 신하들의 읍소는 왕을 한 번 더 고민에 빠지게 하며 상황이 심각함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종묘와 사직이 나라를 상징하는 존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뜻을 최소한으로 헤아리면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廟)이며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壇)이 된다. 둘이 모두 중요하지만 사직은 한양 말고 지방에도 있으니 종묘의 무게감이 조금 더한 듯하다. 
 

그러나 종묘 역시 우리가 역사를 살피기 위해 자주 들러야 하는 공간이다. 딱딱해 보이는 곳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조선의 왕에 대한 여러 장면을 보여준다. 익숙해진다면 처음 느꼈던 종묘의 긴장감은 조금 누그러져 다가올 것이며 어쩌면 역사가 만들어낸 고즈넉함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종묘와 관련해 먼저 생각해 볼 내용은 도읍지 구성의 기본 요소로서 종묘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도읍지를 구성할 때 갖춰야 할 것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종묘와 관련된 원칙이 바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이다. 도읍지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만드는 것이다. 조선시대 좌우는 왕이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것을 기준으로 하니 좌는 동쪽, 우는 서쪽을 가리킨다. 종묘의 위치는 한양도성의 동문(東門)인 흥인지문과 가까운 것을 통해 ‘좌묘’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종묘는 사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할 때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다. 조선시대 이해를 위한 기초인 왕위 계보, 그러니까 ‘태정태세 문단세’로 이어지는 이 이름은 ‘묘호’다. 곧 왕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고 3년 상을 치른 뒤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이름이다. 그래서 종묘의 ‘묘’를 따서 ‘묘호(廟號)’로 부른다. 그런데 이 묘호 얘기가 나오면 따라오는 궁금증이 있다. ‘태조’와 ‘태종’, ‘세종’과 ‘세조’의 차이점 궁금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조(祖)’는 창업지공, 곧 나라를 세운 인물에게 붙이고 ‘종(宗)’은 덕이 있는 왕에게 붙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의 왕위 계보를 보면 태조(왕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으로 끝나는 묘호를 가지고 있다.(원 간섭기 제외) 이 내용을 참고한다면 아무래도 태조가 태종보다 무게감을 주는 것이 맞겠다.

 

그런데 세조가 할아버지인 세종보다 높은 평가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여기에는 당대의 정치적 평가가 포함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지 않았다면 조선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조, 인조, 순조에 대해서는 묘호의 무게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곤란한 면이 있다. 다만, 영조와 정조는 대한제국 시절까지 영종과 정종이었으니 조금 다른 맥락이다.
 

 

이제 종묘의 구조를 살펴보자. 종묘에는 제사 준비를 하거나 왕이 와서 머무는 부속 건물을 제외하고 중심에 두 개의 건물이 있다. 하나는 정전이며 다른 하나는 영녕전이다. 그렇다면 두 건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먼저 정전은 19실, 곧 주인공인 19명의 왕을 중심으로 왕비가 함께 모셔져 있고, 영녕전은 16실로 왕과 왕비가 모셔져 있다(역사적 호칭은 왕, 황제 등 다를 수 있지만 편의적으로 이렇게 정리하고자 한다.)
 

건물의 쓰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사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황제는 7대의 조상, 왕은 5대의 조상, 그리고 대부는 4대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 다만 황제와 왕의 7대와 5대라는 것은 태조, 곧 창업한 왕을 포함하는 숫자이니 1(태조)+6대조, 1(태조)+4대조가 된다. 그러므로 종묘는 황제의 나라라면 7실, 제후의 나라라면 5실이면 족하다. 그리고 대수가 지난 왕이라면 그 신주를 종묘 옆에 묻어야 하지만 왕위에 오른 조상에게 미안한 일이 된다. 그래서 대수가 다 차 종묘에 머물 수 없는 왕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영녕전을 만든 것이다. 이처럼 신주를 옮기는 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지금 제사를 받을 신주를 모신 곳이 종묘, 그리고 조천한 신주를 모시는 곳이 영녕전이 되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정전만을 가리켜 종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조선도 처음 넉넉하게(?) 7실을 갖춘 종묘를 건축했다. 그러던 중 정종이 죽으면서 세종은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태조로 이미 종묘가 5대를 채운 터라 위패를 옮길 영녕전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목조는 영녕전으로 옮겨가고 맨 뒤에 정종이 자리를 잡으며 5대가 정전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굳이 왜 종묘 건물을 7실로 만들었을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례를 염두에 둔 것 같다. 
 

<1묘1실 환조, 2묘2실 태조, 3묘3실 정종 3묘4실 태종, 4묘5실 세종, 5묘6실 문종, 5묘7실 세조>
 

5대를 제사 지낸다는 뜻은 다섯 왕만 제사 지낸다는 것과 다르다. 위 상황은 세조가 죽은 뒤 종묘의 모습인데 정종과 태종이 형제지간이니 대수는 같다. 그래서 같은 대수로 보고 신주를 모시는 공간만 세 번째 방과 네 번째 방으로 구분했다. 문종과 세조 역시 같은 개념으로 공간을 배치했다. 그러니 왕이 형제로 이어질 때는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 다른 조금 본질적인 문제가 생기며 종묘 공간의 부족을 부른다. 문제는 성종이 죽으며 발생한다. 종묘의 7실을 태조, 태종, 세종, 문종, 세조, 덕종(의경세자, 성종이 왕위에 오르며 추존), 예종, 성종이 채워야 하지만 덕종-세조-세종-태종으로 이미 태조를 제외하고 4대를 모두 채운 터라 덕종 자리에 성종이 들어갈 경우 원칙적으로 태종은 영녕전으로 조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종의 신주를 종묘에서 뺀다는 것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태종의 업적이나 현재 왕의 계보로 볼 때(세종 이하는 태종의 쿠데타가 아니었다면 왕위에 오를 수 없다) 영녕전으로 옮기기 미안한 일이 된 것이다. 
 

결국 한나라, 송나라의 사례를 차용해 세실(世室), 곧 위패를 옮기지 않는 것(不遷位:불천위)으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종묘는 태조+세실+4대의 신주를 모시는 방식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문제는 종묘 7실이 부족해질 가능성이다. 이미 연산군 때 세종, 세조, 성종을 미리 세실로 정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으니 공간 부족은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연산군 때 세실 지정 논의는 이후 왕이 죽은 뒤 대수가 다 차서 옮기게 될 때 논의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결국 명종 때 종묘를 11칸으로 증축하지만 세실의 증가에 따라 공간 부족은 이어진다. 심지어 조선 후기에는 선왕을 미리 세실로 정하는 경우가 나타나며 종묘 증축은 필연이 됐다. 이에 따라 종묘 정전은 영조 때 15칸으로, 그리고 헌종 때 19칸으로 늘려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정전 건물은 서쪽, 태조의 신주를 모신 곳을 기준으로 삼아 동쪽으로 조금씩 늘어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왕조의 수명이 연장되며 종묘 정전의 길이도 늘어난 것이니 그 물리적 길이가 조선 역사의 시간을 상징하는 셈이기도 하다. 건물이 있는 공간에 올라갈 수는 없으나 기단 앞에서 한 걸음 걸으며 그 시간의 의미를 헤아려보는 건 특별한 역사 경험이 될 것 같다.
 

종묘 정전, 그리고 영녕전의 의미를 파악하고 안내판을 보면 우리가 외웠던 27대, 조선 왕의 계보와 다른 이름을 만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원종, 진종, 장조, 익종이 있다. 이들은 실제 왕위에 오른 적은 없지만 왕위를 이어가는 과정, 또는 반정 등으로 나중에 왕으로 추존된 왕이다. 원종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며 진종은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 장조는 사도세자이며, 익종은 효명세자다. 반대로 실제 왕위에 올랐지만 신주가 없는 경우도 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니 조선 시대가 인정한 왕과 역사 속 왕이 조금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종묘 답사를 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종묘 건축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 그러니까 왕들의 영혼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공간이 신을 위주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종묘 바닥에 있는 두 갈래 길 가운데 높은 것은 신, 낮은 것은 왕을 위한 길이다. 또 정전의 정문 역시 왕이 아닌 신을 위해 만들어 놓았다.
 

종묘는 조선시대 내내, 그리고 대한제국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성하게 여긴 곳이라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던 곳이다. 그래서 건물 뿐 아니라 숲도 잘 보존돼 있다. 건축물이 아닌 공간을 가득 채운 숲이 주는 색다른 느낌도 종묘의 일부다. 가끔 너구리가 출몰하니 놀라지 마시고 인사를 나누는 것도 그렇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yrkim@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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