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업무수첩에 담긴 비밀
그의 업무수첩은 화첩(花帖)이다. 반듯하게 써 내려간 울긋불긋 글씨들이 잘 정돈된 교정의 화단을 연상케 한다. 서울가곡초등학교 이태구 교장의 업무수첩은 남다르다. 교장실 책상엔 검정·파랑·빨강·초록색 필기구가 항시 놓여있다.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은 4색 펜으로 빼곡히 적는다. 여기엔 원칙이 있다. 학교 내외 행사는 검정색 펜으로 쓴다. 교직원 출장 복무관련은 파랑색이다. 학생·학부모·교사들에게 알려야 할 보고사항은 붉은색. 꼭 강조해야 할 내용은 녹색 형광펜으로 표시해 둔다.
5월 어느 날 업무수첩. ‘열화상 카메라가 온다더니 아직 안 왔다. 내일로 연기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 아랫줄엔 오늘 원격수업 준비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얼마 전 결혼한 선생님의 출산휴가 예정일도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주요 지시사항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뿐 아니다. 인근 학교 코로나 확진자 발생 현황과 대응책도 수첩에 담겨 있다.
업무수첩을 편 순간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제 어떤 일이 있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교감으로 승진한 이후부터 줄 곳 4색 업무수첩을 작성해 왔다. 교장실 책장에는 2014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써온 두툼하고 낡은 업무수첩이 보관돼 있다. 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그는 약속을 잘 지키기위해 업무수첩을 쓴다고 했다. 이렇게 기록을 해 놓으면 학생이든 교사든, 학부모든 그 누군가와 했던 약속들을 잊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충남 청양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장에 오르기까지 그가 세파를 견디고 이겨낼 수 키워드는 ‘약속과 신뢰’였다.
공모교장 1년 반 만에 꽃단장한 가곡초
이 교장은 지난 2019년 3월 가곡초 공모교장에 임용됐다. 학교가 그를 원했지만, 그 역시 꼭 오고 싶었던 학교였다. 할 일이 많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최선을 다한다면 정말 멋진 학교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취임하자마자 교육환경개선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난 1993년 지어진 가곡초는 일명 노후학교다. 건물이 오래된 탓에 우중충한 외관에 내부 시설들도 많이 낡았다. 마곡지구가 건설되면서 주변 환경은 신도시로 변모했지만, 학교만은 섬처럼 따로 놀았다. 이 교장은 외관부터 손을 댔다.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학교 뒤편 녹슨 컨테이너 박스를 치우고 그 자리에 파란 잔디가 깔린 꽃길을 조성했다. 본관 건물 고장 난 벽시계를 고쳐 달고 외벽엔 학교 이름도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급식실과 식당을 증·개축하고 급식실 옥상엔 텃밭을 조성, 상추·가지·오이 등을 두루 심었다. 초등학교지만 놀이터가 없었던 가곡초. 이 교장은 안전과 재미를 두루 갖춘 놀이터를 새로 만들었다.
과학실과 보건실을 넓혀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체육관 온수시설공사, 방송실 공사 등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교실 냉난방 시설을 개선하고 석면공사도 마무리했다. 학교 담장은 새로 단장하고 자동화 시설을 갖춘 주차장을 마련했다. 교문 근처에는 이팝나무를 심고 벤치도 만들었다. 자녀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들이 뙤약볕에 서 있어야 하는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원격수업에 맞춰 무선 AP시스템과 태블릿PC 환경을 구축, 쌍방향 수업에 완벽히 대비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교장은 삭막한 도시환경에 젖은 학생들에게 자연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는 학교 곳곳에 꽃과 나무를 심었다. 실제 가곡초엔 설악초·금계국·매발톱 등 야생화들이 유난히 많다. 일년초를 심을 수도 있었지만 강한 근성의 야생화에 더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학교예산으로 구입하기보다 인근학교들을 수소문해 조금씩 씨앗을 얻어다 심고 가꿨다. 교장실 한켠엔 지난여름 받아 놓은 야생화 씨앗 수십여 종이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나무들도 마찬가지. 조경공사를 하면서 버려진 나무들을 가져와 학교에 심었다. 그는 스스로를 짠돌이 교장이라고 했다. 아낄 수만 있다면 한 푼이라고 아껴야하는 것이 학교 예산이라고 했다.
교감으로 근무하던 시절이다.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벼농사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때마침 모내기 철, 그는 차를 몰고 김포지역 논을 뒤졌다. 그리고 모내기를 마치고 논두렁에 버려진 모들을 얻어와 커다란 고무 물통에 심었다. 그해 가을, 학생들은 교정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벼이삭을 만져볼 수 있었다.
민원 많은 학교에서 민원 없는 학교로
가곡초엔 민원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교장에 부임했을 때만 해도 수십여 건의 민원이 쌓여 있었다. 작년 3월, 민원인들을 모두 교장실로 초대했다. 그리고 직접 담판에 나섰다. 학부모들은 사소한 불만부터 구조적인 문제까지 쏟아냈다. 이 교장은 그들 한마디 한마디를 꼼꼼히 기록한 뒤 하나하나 풀어갔다. 우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성의를 보였다. 학교 측에 과실이 있는 것은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권한과 능력 밖 민원에 대해선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했다. 그날 이후 가곡초는 ‘민원 많은 학교에서 민원 없는 학교’로탈바꿈했다.
“민원이 들어오면 학교는 일단 방어적이 돼요.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는 더 악화되는 법이죠.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성의를 보이고, 할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놔야 합니다. 그래야 신뢰가 쌓이는 법이죠.”
이 교장은 어려운 일일수록 정면 돌파하는 스타일이다. 단박에 민원을 잠재우듯 학교에 시급한 현안도 미적대지 않는다. 가곡초 앞 사거리엔 접촉사고가 잦았다. 신호등이 없는 데다 사각지대가 있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가 빈발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안전이 걱정됐다. 그는 수차례 관계당국에 신호등 설치를 요청했지만, 워낙 여러 기관이 얽혀있는 탓에 쉽지 않았다. 지난해 그는 지역 정치인·구청·경찰서·도시개발공사 등 신호등 설치와 관련 있는 관계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렀다. 따로따로 이야기해서는 부지하세월로 판단, 이날 결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관련 부서와 지역대표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에 회의를 열자 일이 술술 풀렸다. 결국 신호등을 설치하기로 결론이 났고 작년 11월 완공됐다. 이후 올 10월까지 접촉사고는 거짓말처럼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참여·소통·나눔 교육 실천 … 학부모 “우리도 최선 다하겠다” 화답
이 교장의 학교경영철학은 참여와 소통, 배려와 나눔으로 압축된다. 그는 함께하는 교육공동체를 중시한다. 학부모회 공모사업 추진, 학부모 연수, 책 읽어주기 명예교사의 보늬샘 활동, 녹색학부모회 교통안전지도, 학교폭력예방활동 등은 모두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실제 가곡초 학부모총회 때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참여율이 높다. 단순한 행정사항 전달 연수가 아니라 유명 인사들을 초청, 특강을 실시하면서 학부모 참여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엔 탤런트 이광기 씨를 초대, 성황을 이뤘다.
이 교장은 교사들과 티타임도 즐긴다. 학년별 교사모임을 갖고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대접하고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커피 한 잔의 비공식 간담회는 관리자와 교직원 간 벽을 허물고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한다.
가곡초는 또 ‘사랑 愛 아름다운 하루’, ‘나눔 바자회’, ‘월드비전 굿 네이버스’, ‘사랑의 열매’ 활동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학부모들의 호응은 뜨겁다. 지난해 명예교사회장을 맡은 이승진씨는 “책을 통해 마음의 씨앗을 심고 꽃을 피워 책향기 가득한 가곡초가 되도록 열심히 힘을 보태겠다”고 화답했고, 학부모회장 우지현씨는 “학부모회 역할은 우리 아이들 교육에 매우 중요한 만큼 학부모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학교를 위한 노력과 봉사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학부모회장 김현주 씨는 “코로나19로 학교생활이 제한되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가곡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이 고민하겠다”며 “특별히 지원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올해 교직 34년 차를 맞은 이 교장. 삭막했던 학교를 아름다운 자연친화적 학교로 만든 그에게 바람이 있다면 오직 하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회를 만드는데 교육이 기여했으면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하고 학부모가 학교를 신뢰하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교사에게 가장 큰 보람은 제자들이 찾아오는 것이죠. 그들이 오고 싶은 학교, 만나고 싶은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할 마지막 소임 아닐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이 교장이 화단에 심어진 ‘카라’를 가리켰다. 카라의 꽃말은 천년의 사랑, 평생을 교직에 몸담은 그 이지만 아직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족하다고 여기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