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을 재촉하는 비가 마치 여름비처럼 내린 뒤라 복잡한 퇴근길이었다. 이런 날이면 자신의 부피만큼이나 부담스러운 만원 버스, 지하철의 퇴근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참으로 고욕이다. 서울의 출퇴근길은 하루같이 매일 겪는 일이지만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린 날의 지하철 안은 유난히 사람들이 더 붐비고 피로 지수는 수직 상승한다. 퇴근길은 월요일 출근길에 비하면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그날도 오늘처럼 지하철에서 내려 빗물에 젖은 계단을 오르고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바쁘게 승강장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오가는 횡단보도 가장자리에서 노란색의 비옷을 입은 한 노인이 젊은이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라 평소와 같이 무심히 지나치려다 들리는 젊은이의 말이 지나치게 거칠어 이건 아니다 싶어 다가갔다. 노인을 보는 순간 그 노인의 손을 나도 모르게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리움과 반가움에 소리쳐 외쳤다. 꿈에서도 그리던 선생님. 반가움과 함께 죄책감이 교차했다.
"선생님, 이경택 선생님 맞지요? 선생님! 저에요. 저~~."
선생님은 젊을 때는 쓰지 않았던 안경을 썼지만, 전국노래자랑 국민 MC 송해 선생님처럼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짓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이경택 선생님이 분명했다. 선생님도 난데없이 나타나 당신의 이름을 외쳐대는 나를 보고 한참이나 눈이 휘둥그레하며 보시다가 깜짝 놀라셨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동안 동기들과 선생님을 찾아뵙기도 했지만 이후 수많은 세월이 흘러 설마 했는데 이내 알아보셨다.
"아니 자네가 누군가? 자네가…그러니까, 그러니까 거시기 배 교수가 아닌가? 허허 간밤 꿈이 예사롭지 않더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반갑네. 정말 반갑네."
"선생님, 어떻게 이렇게 금방 알아보세요? … 그리고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소릴. 괜찮아.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그 사이 옆에 서 있던 그 젊은이는 내 입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나오고 내가 사이에 끼어들자 다소 머쓱해진 표정을 짓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지 비로소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고 있었다.
선생님은 마지막 검정 교복에 까까머리였던 80년대 초,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셨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선생님은 내가 고1·2 때 교내외 백일장을 휩쓰는 것을 눈여겨보셨는지 학기 초 면담 때 재능을 살려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대학교수가 꼭 되라고 이름 대신 배 교수라고 부르셨다. 당시 수업에 들어오셨던 다른 선생님들도 그렇게 불러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때는 교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왠지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어깨마저 으쓱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정년퇴임 후에 서울의 자식들 성화 때문에 상경했고,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후 소일거리를 찾다가 지역사회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아침과 저녁 시간 붐비는 출퇴근길 교통봉사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마침 선생님은 멀쩡한 한 젊은이가 교통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무단으로 횡단하는 것을 참지 못하시고 기어코 불러서 야단치며 꾸중하는 중이었다.
"선생님 대체 이게 몇 년 만이지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요즘 세상도 험악한데 그러시다 험한 꼴이나 봉변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이보게 배 교수, 좀 하나씩 물어볼 수 없겠나? 난 귀는 둘이지만 입이 하나밖에 없어서 한 가지씩밖에 대답할 수가 없네."
선생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셨다. 희어진 머릿결과 주름진 얼굴을 제외하고는 특유의 유머가 있는 어투와 여유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인근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늦도록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먹고 사는 거야 어렵지 않지. 연금이 나오니까. 그런데 말이야, 뭔가 일을 하지 않고 있으려니 내 체질에도 안 맞아. 몸도 아프고 도무지 밥맛이 나질 않아."
선생님은 내가 현재 고등학교에 적을 두고 있고 대학에도 강의를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의 바람대로 되었다고 여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날 선생님은 연신 웃으셨고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그날따라 비가 내린 날씨 탓인지, 전혀 만나리라고는 기대도 안 한 제자를 만난 기쁨에 들떠 다소 술이 과했던 선생님을 직접 댁에까지 모실 수 있었다. 그날 사모님께도 인사하고 학창시절로 돌아가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내게 선생님은 술기운 속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보게 열심히 하게. 자네에게 수많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미래가 달렸어. 스승의 자리는 참 외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마음 든든한 자리일세. 막중한 자리일세."
햇살마저 따사로운 봄날, 비 내리는 여름날, 낙엽 지는 가을날 등 그 계절에 맞는 시를 읊어주셨다. 교실 창밖을 내다보시면서 밤사이 어렵게 꽃을 피우는 저 열정, 맨몸으로 비를 온전히 맞고 있는 나뭇잎의 의연함, 생명의 마지막까지 남아 나뭇가지에 홀로 매달린 저 나뭇잎의 오기마저 너희들 것으로 하라던 선생님이었다.
사실 나는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교과 선생님으로 만난 이후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푹 빠져버렸다. 대학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그 절박함 속에서도 조급함보다는 여유를 가르쳐 주셨다. 매시간 지식보다는 참된 삶의 가치를 배웠다. 보여주는 베풂과 친절보다는 투박한 질화로 속에서 나는 구수한 군밤 냄새와 같은 인정의 고귀함과 사람을 사랑하는 진정하는 참된 자세를 배웠다.
나도 그랬지만 당시 친구들도 집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다. 일부 친구들은 시내 중심가 유명 학원과 고급 독서실도 다녔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하루 수업이 끝나고 요즘도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일명 ‘야자’라는 야간자율학습을 교실에서 했다. 그때 우리는 집에서 밥만 담은 도시락을 하나 더 챙겨왔다. 수업이 끝나고 밥 도시락을 들고 학교 앞 분식집 라면을 시켜 그 국물에, 또 중국집을 찾아가 오백 원 짬뽕 국물만 시켜서 거기에 밥을 말아 먹고 야자를 하곤 했다. 그러한 우리의 사정을 알고 선생님은 공부하다 허기진 우리를 위해 넉넉지 않은 주머니를 털어 학교 앞 분식집에서 만두, 순대, 떡볶이를 양손에 사 들고 교실로 오셔서 잠시나마 행복에 겨운 시간을 만들어주셨던 참 인정 많은 선생님이셨다.
서울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1년이 흐른 2017년 여름날. 책을 들고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교단 산문집 ‘내가 준 사랑은 얼마큼 자랐을까’를 들고 찾아간 날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마치 당신의 책이 출간된 마냥 좋아하셨다. 비록 고관대작의 자리에 올라 출세한 제자보다도 몇 배나 더 뿌듯하다고 하시며 행복해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감춰야했다.
얼마 전 내가 결혼 주례를 본 한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은 항상 정겹게 제 이름을 불러준 유일한 선생님이었어요. 저는 원래 말을 많이 더듬어 은근히 다들 저를 흉내 내며 놀림감으로 삼았어요. 그 일로 매사 자신감을 잃고 있는 제게 수업시간마다 발표도 시켜주시고 특히 배운 시를 다른 친구들 앞에서 암송하게 했습니다. 그때 배운 시처럼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산 까닭인지 지금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제 짝을 만난 것도 선생님 덕분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고백하지만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선생님의 흉내를 내며 살았다. 결혼 주례를 부탁해 오는 여러 제자가 있었던 것도 그 모두 다 선생님 가르침 덕분이었다.
그런데 올해 봄날 갑자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사모님 말씀에 따르면 그날도 퇴근길 교통봉사를 하시고 집에 돌아오셔서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배 교수는 잘 지내나? 요즘 통 볼 수가 없네. 언제 한번 오려나’ 하시며 내 소식을 궁금해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주무시듯 운명하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선생님의 영정 앞에서 회한의 눈물과 함께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이 바쁘다고 최근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배웠던 고려가요 서경별곡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괴시란대 아즐가 괴시란대 우러곰 좃니노이다(사랑만 해주신다면 울면서 따르겠습니다).’ 끝까지 못난 이 제자를 그래도 사랑만 해주신다면 선생님의 변함없는 제자 사랑과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고 따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 선생님이 되었기에 선생님의 그 많은 가르침을 잊지 않고 ‘내리 사랑’으로 대물림을 하겠습니다. 비록 그 자리가 선생님의 말씀처럼 외롭고 힘들지만, 숭고한 그 스승의 자리를 힘닿는 데까지 마지막까지 지켜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선생님을 만난 지 40년의 세월에 흐른 뒤에야 한결같았던 선생님 사랑에 회한으로 가득한 그리움을 담아 눈물로 쓴 이 사사별곡(思師別曲)을 영전에 지어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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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 사도(師道)의 향기
살다 보면 누구나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어려운 고비가 있고 힘든 오르막길이 있지요. 우리 교직은 더 그렇습니다. 그 길에서 이정표를 잃은 것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늘 우리 곁에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동료 선생님과 아이들이 있다면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되지요. 따스한 손을 내밀어 주면 없던 힘도 다시 샘솟지요. 제 경우가 그랬습니다. 매일 만나는 동료 선생님과 아이들이 지금껏 삶의 활력소이자 에너지였습니다. 어느 시인이 ‘꽃은 젖어도 그 향기는 젖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 향기는 다름 아닌 스승이 걸어가야 할 사도(師道)의 향기, 바로 교직이 가진 힘이 아닐까요.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누군가 내뱉는 말처럼 교직이 너무 쉽고, 마치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못다 핀 꽃 하나가 유성(流星)처럼 소리 없이 저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참된 선생님, 진정한 스승이 그 어느 시대보다 귀하고 소중해졌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는 게 힘들고 서로 헐뜯고 비난한다고 해도 주변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스승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 아닐까요. 살면서 가장 존경했던 스승님과 그 삶을 그리워하며 직접 느껴보려 했습니다. 이제 함께 꽃보다 더 아름다운 스승의 길을 동행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