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을 대표하는 살림집이라면 오죽헌을 꼽을 수 있다. 이미 조선시대에 사임당 신씨와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는 점에서 명성이 높은 곳이다. 거기에 더해 조선 후기, 금강산과 관동팔경 기행이 유행하며 강릉 여행에서 꼭 방문해야 하는 장소가 됐다. 이런 오죽헌의 명성은 개인의 집이면서도 별도의 방명록인 <심헌록>이 있다는 점에서 그 특별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강릉에서 규모만 놓고 본다면 가장 큰 집은 아무래도 선교장이 될 것 같다. 옛 모습과 조금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만 하더라도 건물이 100여 칸, 면적은 1000㎡에 이른다. 선교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30여 채의 초가집도 넓은 의미의 선교장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규모가 여느 살림집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도 다른 한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이름이다. 보통 집 밖에 당호를 걸지도 않거니와 집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주인의 호나 사랑채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이나 충효당이 사랑채의 이름을 붙인 사례라면 원래 이름은 아니어도 예산의 ‘추사고택(추사 김정희)’이나 논산의 ‘명재고택(명재 윤증)’이 주인의 호로 집을 부르는 예가 될 것 같다.
오죽헌과 긴밀한 관계 있어
조금은 독특하다고 할만한 선교장의 이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장원’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진 ‘장’의 의미다. 이는 선교장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여유와 관련이 있다. 선교장 주인이 소유하던 토지는 북쪽으로는 주문진과 양양, 남쪽으로는 삼척과 울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처럼 선교장은 오죽헌과 더불어 강릉을 대표하는 살림집인데, 흥미롭게도 이 두 집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
선교장을 지은 이는 이내번으로 알려져 있다. 1760년 경에 선교장을 지었다. 그런데 이내번이 원래 살던 곳은 강릉이 아닌 충청도 땅 충주였으니 아버지 이주화 때까지 대대로 이씨가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별다른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자 이내번의 어머니 권씨는 자식들을 데리고 강릉으로 왔다. 그 이유는 어머니 권씨의 친정이 강릉이었으니 그중에서도 자신이 살던 집이 바로 오죽헌이었다. 앞에서 잠시 나온 오죽헌에 선교장 주인 이내번의 어머니인 안동 권씨 집이 된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오죽헌은 사임당 신씨,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지만 당시 이 집의 소유권은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아닌 어머니 용인 이씨에게 있었다. 이 시기만 해도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줌에 있어 딸과 아들의 구분이 없이 비슷하게 나눠주던 때였다. 또 부부가 별도로 재산을 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용인 이씨는 재산을 상속할 때 자식들에게 나눠줬으니 이때 사임당 신씨와 남편 이원수는 서울 집을 비롯해 약간의 농토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용인 이씨는 자신과 남편인 신명화의 무덤을 돌보겠다고 한 넷째 딸과 사위 권화에게 강릉 집을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재산을 물려받은 뒤 성리학 영향으로 재산 분배 방식이 균등 상속에서 아들 중심으로 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화는 강릉 집을 아들인 권처균에게 물려줬다. 권처균은 이이와 이종사촌이다. 권처균은 자신이 사는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으로 지었다. 그러다 보니 권처균이 살던 강릉집 역시 오죽헌으로 불렀으니, 사실 집 이름으로서 오죽헌은 사임당과 이이 시기의 이름이 아닌 권처균의 시기에 붙인 이름이 된다. 이후 안동 권씨는 오죽헌에서 계속 살았으니 이내번의 어머니 안동 권씨는 권처균의 증손녀가 된다.
안동 권씨는 남편이 죽은 뒤 친정 근처에 살며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 권씨는 물류가 많았던 충주에 살면서 소금 유통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들인 이내번과 함께 강릉 남대천 석호 일대에 염전을 일궈 재산을 불려 나갔으니 이를 바탕으로 논과 밭을 사들였다. 그리고 새롭게 집을 지을 공간으로 배다리골이 눈에 들어왔으니 이를 사들인 뒤 5~6년의 준비 끝에 선교장을 지어서 들어간 것이다.
서로 가까이 있으나 다른 내력을 가진 공간으로 여겼던 오죽헌과 선교장은 이렇게 인연이 깊다. 이후 이내번의 후손들은 같은 시기 다른 양반과 달리 경제에 큰 관심을 뒀다. 실용적인 분위기가 가풍으로 자리를 잡은 것인데 그 과정에서 선교장과 함께 앞에서 살펴본 여러 지역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선교장 역시 증축과 변화가 이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으니 대략 300여 년 역사를 담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활래정에서 답사 시작하면 좋아
그렇다면 선교장의 모습은 어떠할까. 답사는 동선 선정이 중요한 편이다. 그래서 차가 다니는 큰길에서 선교장으로 들어갈 때 솟을대문으로 곧장 들어가서 사랑채며 안채를 살핀다면 선교장 구경을 반 정도만 하는 셈이 된다.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잠시 여유를 갖고 둘러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선교장 앞에 제법 큰 연못과 함께 근사한 정자가 있고 그 정자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정자는 활래정이며 문 이름은 월하문이다. 이곳에서 선교장 답사를 시작하면 좋다.
‘월하문’은 달빛이 내리는 문이란 뜻이니 옆에 달린 주련에는 그와 어울리는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가 적혀있다. 뜻을 풀어보면 ‘새는 연못가의 나무에서 자고,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가 된다. 비록 늦은 밤이지만 편하게 문으로 들어오라는 뜻이기도 하다. 경포호로 대표하는 이 지역의 풍광과 잘 어울리는 시인데, 이 시는 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 속에 문을 열 때 ‘두드를 고’와 ‘밀 퇴’ 사이에 고민하던 시인이 두 글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처음 쓴 ‘두드릴 고’를 썼다.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 원고를 고치고 살필 때 쓰는 말인 ‘퇴고(推敲)’다.
월하문을 지나면 활래정이 나온다. 1900년 정도에 세운 것으로 ‘활래’란 이름 역시 주자의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주자가 자연을 의인화해서 시를 지었는데 대략 내용은 이러하다. ‘어떻게 너는 이렇게 맑을 수가 있느냐, 그러자 연못이 대답하길 끝없이 샘물이 솟아 이렇게 될 수 있다’란 내용의 시구인 ‘위유원두활수래’에서 ‘활래’란 이름을 딴 것이다.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은 연못이 맑은 이유가 끝없이 흐르는 샘물 덕분인 것처럼, 한 집안이 융성해지기 위해서는 손님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닐까.
실제로 활래정은 손님이 머무는 공간으로 자주 쓰였다. 정자이긴 하지만 온돌까지 갖추고 있어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머문다면 바로 앞에 작은 호수도 그렇고, 예전 경포호가 넓었던 시절에는 조금 멀리 또 호수가 보였으니 마치 섬과 같은 공간처럼 생각됐을 것 같다. 갑자기 선교장의 손님이 되어 그런 호사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활래정을 지나면 선교장 본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이 있다. 그런데 문 옆에는 ‘선교장’이란 본래 집 이름이 적혀있지만 문 위 다른 편액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란 글자가 적혀있다. 배다리를 뜻하는 선교와 발음은 같으나 다른 글자를 써서 ‘신선이 사는 높고 그윽한 집’으로 부르고 있다. 집 이름 하나로 답사 온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선교장의 집 구조는 여느 한옥과 조금 다르다. 왼쪽으로 사랑채인 열화당이 있고 오른쪽에 안채가 있는 것이 보통의 한옥과 같다면, 안채를 중심으로 다시 왼쪽에는 서별당, 그리고 오른쪽에는 동별당을 둔 구조는 조금 복잡한 편이다. 부속 공간으로 사당과 함께 열화당 뒤쪽으로 초정도 있어서 공간 활용을 다양하게 했으며 쓰임도 시기에 따라 달라졌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서별당의 경우 일부 공간은 사랑채와 연결된 영역으로, 일부 공간은 안채와 연결된 공간으로 썼다고 한다.
서양식 건물인 사랑채 열화당
선교장에서 눈을 사로잡는 것은 서양식 차양을 걸친 조금 거창한 건물인 사랑채 열화당이다. 열화당이란 이름 역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친척과 더불어 정답게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이란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 사랑채 앞에 동판을 씌운 차양이 있다. 한옥 건물에서 이러한 차양을 친 모습은 다른 한옥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서양식 구조물을 댄 부분은 독특하다. 이런 모습이 생겨난 배경에는 러시아 공사관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업무를 볼 때 선교장에서 호의를 베푼 것에 대해 러시아 공사관 측에서 지원한 것과 관련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별당과 사당 건물까지 둘러보면 보통 집 답사는 끝나는 편이다. 그런데 선교장은 답사가 집 밖으로 이이진다. 곧, 선교장을 집 안에서만 보는 것, 혹은 정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볼 수 있도록 길을 낸 것이니 동쪽으로 낸 길을 청룡길, 서쪽으로 낸 길을 백호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길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걸어 보아야 선교장 답사를 그럭저럭 끝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선교장은 조선시대에 조금씩 명성을 높여갔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선교장 주인들이 손님을 환대한 것과 함께 금강산이며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하며 선교장 역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서다. 우리 역시 선교장 답사를 했다면 옛 선비들처럼 관동팔경도 살펴보고 또 금강산 가는 길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역사를 보면 대체로 지금이 예전보다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금강산 얘기만 나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과거에는 다니던 공간,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을 향한 고민의 무게도 마음에 담아 나오게 된다. 언젠가 그런 고민 없이 선교장, 오죽헌을 지나 관동팔경 모두를 살펴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