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생존을 위한 도구상자에는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 들어있지 않다. 생존상자 안에는 풍부하고 건강한 의식, 개척자 정신, 소박함, 올바른 생활방식, 균형 잡힌 훈련, 책임의식, 수준 높은 양심에 대한 요구 등이 들어있다. 이것들은 꼭 필요한 사고방식이자 행동방식이며 살아남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제럴드 셀런트(미래학자)
미래학자가 내다본 21세기 생존을 위한 도구상자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흔히 다가올 미래는 최첨단 정보기술 시대이므로 필요한 도구 역시 그러한 것들로 채워질 거라고 추측하기 쉽다. AI를 비롯해 최첨단 자동화기기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을 상상하기 쉽다.
놀랍게도 미래학자가 생각한 도구상자에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자질이 대부분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는 세상을 지켜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푸대접하고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가치혼돈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기에 좋은 일침이다. 우리는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다움을 존중한다는 것을! 그 외의 모든 것들은 그저 도구일 뿐 그 사용자의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최첨단 정보 시설을 갖추고도, 급박한 사고 내용을 시시각각 신고한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CCTV로 엄청난 재난의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보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다. 그러니 그 시설과 시스템을 운용하는 그 사람의 품성과 인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10.29 참사는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한다는 IT강국의 이미지는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시스템을 부리는 사람들의 안일한 일처리 방식, 서로 떠넘기고 숨기고 거짓말로 모면하려는 술수를 보인 관료들의 모습은 대한민국 정부의 나사가 얼마나 허술하게 풀렸는지 잘 보여주었다.
어느 책에선가 핀란드가 왜 선진국인지, 얼마나 청렴한 공무원들의 조직인지를 본 글이 생각난다. 세계 최고의 담세율로 복지국가를 이룬 바탕에는 청렴함과 성실함으로 무장된 국민정신이 있다는 것을. 해외에 나가서 자국을 대신하여 일하는 공직자는 자기 한 사람이 곧 국가라는 마음으로 일한다고 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윗선에 보고하고 처리 방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해야 할 최선의 방식으로 그 자신이 대통령처럼 일을 하는 게 핀란드의 공직자의 모습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과 매뉴얼도 완벽하게 숙지하고 국가를 대신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책임을 미루거나 방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출장을 가더라도 사후 보고서를 철저하게 작성하고 비용이 남는 경우에는 모두 반납하는 시스템이다.
만약 대한민국 행정부의 일머리 시스템이 핀란드처럼 작동했다면 158명이나 희생자를 만든 대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한 곳만이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내가 일하는 곳이 국가를 대신하는 자리라는 뚜렷한 복무 자세를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사 발생 후 기민하게 대처한 현장 경찰과 소방관, 함께 마음을 모은 시민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더 큰 불행을 막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일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 선제적이고 철저한 예방 대책을 건의했음에도 묵살한 고위층의 책임, 아예 대책조차 수립하지 않은 지자체의 업무 태만, 협조 요청조차 무시한 채 대통령을 수호하기 위한 경찰력 낭비, 마약사범 검거로 승진 점수를 따기 위한 절호의 찬스로 경찰력을 투입한 점 등 시간이 갈수록 밝혀지는 10.29 참사의 실태는 대한민국이 거의 무정부 상태였음을 고발하고 있어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모든 사태의 진원지이자 시발점인 대통령이 그 모든 책임을 참혹한 현장에서 동분서주하며 피해자들을 구출하고 발로 뛴 경찰관과 소방관들에게 돌리고 있는 웃지 못 할 현실이다. 머리가 돌지 않아서, 판단력이 부족한 핵심 수장들이 실실 쪼개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도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자들이 거짓말로 빠져 나갈 궁리만 하는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다.
멀쩡한 청와대를 놔두고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기겠다고 할 때부터 이미 틀어지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원하지도 않은 일을, 국민적 저항을 받으면서도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연쇄적으로 이사를 가야 했던 국가기관의 혼선은 그야말로 난리가 아니던가. 전임 정부가 오랜 시간 공들여 이루어놓은 훌륭한 시스템을 내던지고 흠잡고 몰아내는 상황에서 관료조직은 움츠러들었을 것이고 다치지 않으려는 본능적 감각이 작동했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출퇴근 하는 대통령이라니! 갑작스럽게 닥친 출퇴근 하는 대통령을 책임지는 용산경찰서는 업무 과부하로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고, 경찰력이 빠져 나가니 이미 업무 공백이 생긴 상태였을 것이다. 대통령 부부가 백화점이나 빵집을 가거나 주말 나들이까지 경찰차가 늘어서고 경호원이 즐비한 풍경이라니! 조선 시대 왕의 행차만큼이나 요란한 행차를 즐긴 6개월이 가져온 참사였음을 모르는 사람은 용산 대통령실 뿐이다.
핀란드 국민들은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많지만 그 세금을 정직하게, 청렴하게 국가발전에 사용해줄 것을 믿는다는 것, 내가 낸 세금이 결국 자신의 복지를 위해 쓰일 것이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국민정신이 부러웠다. 근면하고 정직함을 최상의 국민정신으로 장착했기에 오랜 식민 역사를 극복하고 혹독한 자연환경을 딛고 일어선 핀란드 국민들의 성공신화는, 곧 인간승리의 역사가 분명하다.
21세기 생존을 위한 도구상자는 한 개인도, 한 국가도 꼭 지녀야 할 시대를 넘어 꼭 필요한 상비약이 분명하다. 초고속으로 달리는 시대일수록 더 촘촘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다. 미래학자가 제시한 '풍부하고 건강한 의식, 개척자 정신, 소박함, 올바른 생활방식, 균형 잡힌 훈련, 책임의식, 수준 높은 양심에 대한 요구'는 공교육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서 더욱 소중한 덕목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에 두어야 할 것은 수준 높은 양심에 대한 요구가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덕목임을 10.29 참사는 아프게 보여주었다. 양심은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최고의 덕목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생존을 위한 최고의 도구 중에서 단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수준 높은 양심에 대한 요구'가 분명하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거의 모든 무질서와 혼란 속에는 양심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으니! 그것은 '인간은 본래부터 선하다'는 전제를 품은 아름다운 단어다. 양심은 바로 아름다운 마음과 이음동의어다. 우리 안의 양심, 아름다운 마음의 꽃을 피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