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변함없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의 과정으로 8km의 걷기를 실시했다. 요즘은 왜 이렇게 과거보다 걷기에 더욱 집착을 하는 것일까? 이유인즉 단순한 까닭에 있다. 첫째,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유발하기 때문이다. 환갑을 지난 나이로는 젊은 사람들처럼 달리기 등 활기찬 운동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도 함께 한다. 따라서 편안하고 안정된 운동 겸 삶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리게 된다. 둘째,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실망과 분노가 찾아와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걷기를 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사의 시름을 잊고 비우는 시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걷기를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성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사가 잘 풀리지 않아 고민할 때, 나만의 고독한 시간을 갖고 싶을 때, 건강을 위해 무리 없이 운동하고 싶을 때,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싶을 때, 가까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친교를 다지고 싶을 때, 세상으로 자신을 내던져 실존에 대한 강한 욕구를 드러내고 싶을 때, 식사 후에 긴장을 풀면서 잠시 업무에서 자유롭고 싶을 때, 분노를 참기 어려워 마음을 다잡고 마음의 평정을 얻고 싶을 때, 제집을 떠나 자기를 버림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부과한 시련을 통해 속죄하고 어떤 장소의 위력에 접근함으로써 거듭나고자 할 때 등이다.
필자는 걷기를 통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삶 속에서 비움과 채움의 시간을 찾고 싶을 때'라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한가? 자기만의 독특하고 다양한 비법을 가지고 시도하여 효과를 얻고, 그 효용성에 대한 믿음이 굳어지고 행동을 습관화하고 싶을 것이다. 이는 마치 사람에 따라서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는 방식으로 삶의 행복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잠시 즐거움을 얻고 무언가를 잊으려고 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멍때리듯이 몸을 움직이는 것 등도 유사한 의미라 할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위와 같은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소위 만능치료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걷기에 애정을 듬뿍 담아 살아간다. 이는 결코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품격을 간직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성향이 보편적이다. 따라서 이 기회에 자기의 세계를 열어 놓고 몸으로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행복한 감정을 추구할 수 있는 비법으로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소개하고자 한다.
걷기는 몸을 이용한 운동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동작이 그렇게 다양한 기쁨을 주는 원천이라는 데 놀랍다. 수많은 여행서, 인문서, 소설 등에는 '걷기의 즐거움'을 말한다. 걷기는 운동 차원을 넘어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방편이며 직진으로 브레이크 없이 내닫는 현대의 삶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는 휴식이다. 다이비드 르 브르통은 건강을 위해 걷기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걷기'야말로 삶의 예찬이며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인식의 예찬이라고 말한다. 사회학 교수인 저자는 '걷기'라는 수단을 통해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것, 가져야 하는 것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걷기 예찬론을 직접 들어 보자.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그것과 달리 걷기는 눈의 활동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둘러 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해서 걷는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 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그것은 오직 순간의 떨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면의 광맥에 닿음으로써 잠정적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는 행위다. 걷기는 어떤 정신 상태, 세계 앞에서의 행복한 겸손, 현대의 기술과 이동 수단들에 대한 무관심, 사물에 대한 상대성이 감각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즐기는 센스를 새롭게 해준다."
그렇다면 걷기를 즐겨하며 자기 삶의 소중한 방편으로 활용한 세계적인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먼저 서양의 경우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걸으면서 내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 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철학자 니체는 한 아포리즘에서 단정적으로 말한다.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하나의 몫을 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들판을 건너질러서, 때로는 종이 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한 그의 역할을 당당히 해낸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심오한 영감의 상태, 모든 것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에서 떠올랐다. 극단의 육체적 탄력과 충만감을"이라 고백했다.
장 자크 루소에게 있어서 걷기는 고독한 것이며, 자유의 경험, 관찰과 몽상의 무한한 원천, 뜻하지 않는 만남과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가득한 길을 행복하게 즐기는 행위였다. 날마다 월든 호숫가를 걸어 다니며 19세기의 경전이라 일컬을 만큼의 위대한 저작을 남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방랑을 즐긴 시인 랭보, 걸어서 일본 각지를 여행하며 많은 시와 기행문을 남긴 하이쿠 시인 바쇼, 프랑스 출신 르네 카이예는 10대 때에 아프리카 팀북투에서 사하라사막을 횡단해 탕헤르와 툴통을 거쳐 파리까지 사선을 넘는 고난의 여정을 펼친 바 있어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대작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청년 시절 걷기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열광적으로 토로한다. "젊다는 것, 스물다섯 살의 젊은이라는 것, 신체가 튼튼하다는 것, 자기의 가슴을 쪼그라들게 하거나 만사를 한결같이 무사무욕하게,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남자든 여자든 결코 사랑할 수 없다는 것, 봄철이든 여름철이든 상관없이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가을이건 여름이건 비를 맞으며 혹은 과일을 짊어지고 이탈리아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혼자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보다 더 큰 행복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동양의 사례를 보자.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해 직접 제작한 지게처럼 생긴 배낭을 짊어지고 672년에 인도를 향해 걷기 시작해 고비 사막을 건너 꿈에 그리던 서역에 도착했다. 그의 '대당서역기'는 각지의 지리와 역사, 전설, 풍속 등은 물론 지리역사학, 고고학, 언어학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법정 스님은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이 산하대지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위해서보다는 우리의 두 발을 위해서 예부터 있어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 속에는 미묘한 자력이 있어 우리가 무심히 거기에 몸을 맡기면 그 자력이 올바른 길을 인도해 준다고 옛 수행자들은 믿었다.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사람만이 오묘한 자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라고 걷기의 의미를 밝혔다.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은 말했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이 책 '걷기 예찬'은 '혼자 걷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선물한다. 철학적인 저자 다비드 르 브르통이 안내하는 문학과 산문, 인문학, 사람들의 숲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한 권의 책을 다 읽게 된다. 집을 떠나 걷는 것은 자기를 나그네로 변모시켜 매일같이 순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 정체성을 찾아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요즘, 일상에서 일의 노예로 살기보다 걷기를 일상생활의 습관으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모든 이가 건강과 자기의 내면에서 참 ‘나’를 만나는 위대한 실행을 연출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길, 그것은 바로 필자가 걷기에 매달려 실행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소확행)임을 다시금 고백하며 이를 모든 이에게 함께 할 수 있기를 권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