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년

2022.12.26 15:54:13

딸이 없어 슬프다는 아흔 살의 할머니

 

겨울 아침 산책길에 날마다 만나는 백발 할머니가 있다. 이른 시각에 나선 노인이 걱정 되어서 말벗을 자청하곤 한다.

 

"할머니, 오늘도 장갑을 끼지 않으셨네요.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갑자기 넘어지시면 큰일 나십니다. 장갑을 꼭 끼시고 손을 내놓고 걸으세요."
"아이고, 고맙소! 오늘도 깜빡 잊고 그냥 나왔네요."

"날씨가 추운데 나오시지 말고 따뜻한 낮에 산책하시지요."

"아, 아침밥을 사먹으러 나왔어요. 나는 혼자 살아요. 아들은 넷을 두었는데 모두 출가하고 집에는 나밖에 없어요. 밥을 해먹자니 힘들어서 사먹어요. 딸이 있으면 이렇게 옆에서 말동무도 해줄 텐데 그게 슬퍼요."
"아니, 아들이 넷이나 있으신데, 복도 많으신데요."

"아이고, 아들 많으면 뭐해요. 딸 하나만 못해요."

 

딸이 없어서 슬프다는 할머니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경제력은 있으니 사는 데 지장은 없다는 할머니는 한 겨울에도 아침식사를 위해 시장에 가서 해결한다는 것. 한 끼 식사 5천 원짜리를 절반도 먹지 못하신다며 그나마도 집에서 해먹으면 버리는 게 더 많으니 사먹는 게 더 낫다고 하신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아침 식사를 위해 나오지 못하실 텐데 안쓰러워 보였다. 평생 내복을 입지 않을 만큼 건강하다는 아흔 살의 할머니. 그럼에도 허리도 꼿꼿하고 잘 걸으셨다. 40년 동안 바느질을 하셨다니 그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아들 넷을 잘 키우셨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예전 같으면 그 연세의 노인은 아들 며느리의 시중을 받으며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세상이 변해서 그런 꿈을 꾸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되었다.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이 아프다. 오래 전 역사학자였던 토인비는 세계에서 가장 부러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어른을 모시고 살며 효를 중시하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 가난한 시절, 동네에서 혼자 사는 노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가족들이 부양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 혹시 혼자 사는 노인이 계시면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들여다보고 먹을 것을 챙겨드리곤 했는데, 이제 고독사를 걱정하는 슬픈 현실이다.

지난해 발생한 사망자 100명 가운데 1명은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난 다음 뒤늦게 발견된 고독사였다. 고독사 사망자 절반 이상은 50~60대 남성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러니 이제 고독사는 노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젊은 층에서도, 40~50대 중년층에서도 일어나는 전 세대의 문제가 되었다. 하루 9명씩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는 슬픈 현실이니,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의 뒤안길에는 이렇듯 물질문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서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현명해지는 게 아니라 더 영악해지고 말았다.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물질이 끼어들면 어디서나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좋은 집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며 고급 차를 몰고 다니면 더 행복해야 할 텐데 사람들의 가슴은 더 차가워지고 양심은 점점 작아지는 걸까!

뉴스를 도배하는 흉악한 범죄 소식의 발단은 대부분 돈에서 비롯되고 결말은 매우 불행하다. 속된 말로 '돈에 취하면 돌아버리니 돈이다'. 돈 사람이 너무 많다. 최고 학부를 나온 학자도, 최고위층 법관도,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정치권력도 모두 돈에 취해서 돈 사람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오죽 하면 서울대 학생들조차 10억이 생긴다면 교도소에 가는 일쯤은 괜찮다는 웃지 못 할 소식까지 있었으니.

인간은 성숙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아주 많이 드는 데 비해 가성비는 매우 낮은 족속이 분명하다. 사람다움에 이르는 데 학벌과 학력이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다. 많이 배울수록 더 효도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더 인간적인 것 같지도 않다. 양심보다는 법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들끓는 세상이 무섭다. 이제는 학교 교과목에 법을 다루는 교육과정이 필요해진 듯하다.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 즉 법치국가는 가장 낮은 수준의 나라가 분명하다. 그러니 매사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니 날이 갈수록 법이 많아지게 되는 건 당연하다. 그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기능적이고 불행한 전조가 분명하다. 도덕과 양심은 사라지고 법이 군림하는 세상은 너무나 매몰차고 냉정한 사회가 아닌가.

오늘 아침에는 폭설이 내렸다. 아름다운 눈조차 낭만이 아닌 사람들이 널렸다. 아무리 많은 눈이 와도 일하러 가야 하는 사람들, 배달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난방조차 무서워하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 추위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 눈길 빙판이 무서워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나도 그렇다.

눈길 산책을 나가는 것은 모험이다. 이젠 눈 내리던 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책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이다. 문득 아침마다 식사를 하러 외출하던 아흔의 그 할머니가 걱정이다. 대체 음식이라도 드시고 오늘만은 집에 계셨으면 좋겠다. 들여다 볼 이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할머니 전화번호라도 알아두지 못한 게 아쉽다. 동사무소의 돌봄 대상이 아닐 듯하다.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독거노인이지만 친족이 많으니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렇게 눈이 많이 왔으니 아들들이나 며느리가 연락을 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산책길에 어쩌다 만나는 길손조차 걱정하는데 자식들이 챙길 것이 분명하다. 저 함박눈이 세상의 불행과 어두움은 모두 덮었으면 참 좋겠다.

 

 

장옥순 작가, 전 초등 교사 jos2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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