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여행] 창경궁, 그리고 함춘원

2023.05.08 09:00:58

 

조선의 궁궐 가운데 이름을 되찾은 곳이 있다. 바로 창경궁이다. 올해로 40주년이다. 조선시대 생겨난 궁궐이 이름을 잃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창경궁이 ‘창경원’이던 시절이 있었으니 궁궐 역사의 아픈 순간이었다. 그 역사의 흐름을 한번 따라가 본다.

 

조선의 역사를 품은 공간

 

창경궁 자리에 궁궐이 처음 생겨난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다. 세종은 아버지인 상왕 태종이 따로 머물 공간을 마련했으니 이때 이름은 수강궁이었다. 성종이 즉위한 뒤 왕실의 어른인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 그리고 친모이며 추존 덕종의 왕비인 소혜왕후가 따로 머물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지금의 창경궁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광해군 때 명정전을 비롯해 전각의 복구가 이루어지며 다시 궁궐의 모습을 갖췄다. 다만 창경궁은 왕실 가족이 머무르기 위해 만든 궁궐이라서 내전이 발달했으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처럼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가리켜 ‘동궐’이라고 불렀다.
 

창경궁에 시련이 닥쳐온 것은 근대의 일이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경운궁(덕수궁)에 고종이 머물면서 순종은 다른 궁궐인 창덕궁으로 옮겨 갔다. 이때 통감부는 순종 황제를 위한다는 이유로 창덕궁 옆 궁궐인 창경궁을 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당시 유럽, 일본에서는 도시의 공원을 근대가 낳은 발명품으로 생각했다. 일종의 선진문물이었으니 자연의 모습으로 꾸민 공간을 도시에 만들어 산책도 하고 스포츠 활동을 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었다.
 

아직 국권을 빼앗긴 시절은 아니었지만, 대한제국의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겼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뜻에 따라 창경궁 명정전 남쪽에는 동물원을, 임금이 농사 시범을 하던 내농포가 있던 권농장 일대에는 큰 연못과 함께 식물원을, 그리고 자경전 터에는 일본식 건물의 박물관을 세웠다. 또 명정전 앞 신하들이 조회 때 섰던 품계석을 모두 없앴으니 궁궐에서 왕과 신하가 더불어 이뤘던 정치의 의미를 희석하고자 했다. 
 

창경궁에 조성한 공원이 완성될 즈음 일제는 공원 조성이 원래 목적과 달라졌음을 밝혔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은 ‘실물 교육기관으로서 국민의 위안 장소로서 일반인을 위해 공개한다’라고 밝힌 것이다. 처음 궁궐에 공원을 만들며 순종 황제를 위한다는 명목과 다르게 일반인에게도 공개를 시작한 것이다.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이름마저 바꾸었다. 공원으로 변한 창경원을 위해 창경궁의 옛 전각 60여 채가 헐려 나간 상황이었다. 나아가 일제는 창경원을 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창경원에서 다양한 박람회를 열어서 과거의 조선과 새로운 문물의 식민 통치를 비교하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공원이 된 창경원에 일제는 1000 그루에 이르는 벚나무를 심으며 우리나라에 벚꽃놀이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창경원은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으니, 광복 이후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1949년 정부 공보처에서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문화공간인 궁궐과 사찰에서 유흥이나 연회, 운동을 금한다’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더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창경궁을 비롯해 경복궁, 덕수궁을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담화를 발표하며 창경원,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해 특별한 조처를 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서울에 별다른 여가 공간이 없는 상황에서 창경원 폐쇄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정부의 방침은 황폐화한 동물원과 식물원을 복구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공원의 핵심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원을 복구하기 위해 외국과 무역하는 회사에서 일정량의 동물을 수입하도록 할당하기도 했다. 제일제당이 인도코끼리 1쌍, 조흥은행은 얼룩말 1쌍, 한국은행은 사자 1쌍을 수입해서 기증한 것이 그 사례다. 더불어 그동안 금지되었던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도 1958년 재개됐다. 정부 주도의 주요 행사와 어린이날, 어버이날 행사도 열리며 창경원은 다시 서울을 대표하는 공원이 됐다. 이러한 창경원의 모습은 1973년, 어린이대공원이 생기며 일시 분산되었지만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영역에 있던 창덕궁(주로 ‘비원’으로 불렀다)은 궁궐, 창경궁은 공원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1981년, 정부는 창경궁의 원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마침 과천에 서울대공원이 생기며 계획은 탄력을 받았으니 창경원의 동물원은 자연스럽게 과천으로 옮겨갔다. 1983년 12월에 일반관람을 중지하고 ‘창경궁’이란 이름을 다시 찾은 뒤 궁궐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6년 8월, 창경궁은 궁궐로서 모습을 되찾고 관람객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40년이 흐르는 동안 창경원 시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고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 가운데 한 곳으로 조선시대 역사를 살펴보는 역사 공간의 하나가 되었다. 
 

창경궁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할 곳은 어딜까.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던 편전인 문정전과 그 마당은 영조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지금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의견이 나뉘지만, 이를 통해 정치의 비정함을 살필 수 있으며 이후 즉위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펼친 정치의 기본방향을 이해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곳이다.
 

반면, 내전 가운데 한 곳인 경춘전은 따뜻한 내력을 가진 곳이다. 소혜왕후, 인현왕후와 함께 혜경궁 홍씨가 머물렀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여기에 머물던 시절 정조를 낳았으니 경춘전은 정조가 태어난 건물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 꿈에서 봤던 용을 그려서 경춘전 벽에 걸어뒀다고 한다. 차갑기만 한 왕실에 따뜻한 가족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아직 창경원 시절의 모습도 일부 남아 있다. 춘당대 앞에 만든 연못과 식물원은 옛 궁궐의 모습이 아닌 공원의 모습이다. 편한 마음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창경궁에 있었던 다양한 역사의 층위 가운데 하나이다. 또 이러한 현재의 모습은 부득이한 상황이 아닌 선택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궁궐의 후원이었던 함춘원

 

창경궁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넓은 공간, 예를 들어 홍화문 밖 함춘원 영역으로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창경궁 건너에 있는 서울대병원 일대의 지형은 건물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야트막한 언덕이다. 경치가 좋았던 이곳을 성종은 궁궐의 후원으로 운영했다. 나중에 후원 일부에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으니 이 시기의 이름은 함춘원이었다. 봄을 머금은 후원! 
 

함춘원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 변화가 일어난 것은 영조 때 일이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처음에는 순화방 일대에 만들었다가 함춘원 영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곧 함춘원에 수은묘가 들어선 것이니, 정조가 즉위한 이후 수은묘를 다시 경모궁으로 높이며 조금 더 격식을 갖췄다. 곧 경모궁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위한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1899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그리고 다시 ‘장조’로 추존하면서 종묘에 위패를 모시게 된다. 이에 따라 경모궁은 그 역할을 다한 셈인데 이 공간에 다시 조선의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는 영희전을 설치했다. 
 

 

지금 서울대학교 병원 안쪽에는 함춘원의 흔적인 함춘문, 영희전의 중심 건물이 있던 곳에는 넓은 월대가 남아 있다. 이 영역은 경모궁이었으니 창경궁과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또 여기에 대한제국 시절 순종의 칙령으로 문을 연 대한의원이 들어서면서 또 다른 흐름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 역시 함춘원 역사의 일부이자, 더 크게는 창경궁 역사의 일부라고 할 것이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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