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는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서간도 일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있었던 북간도 일대를 생각하면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런데 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이 아니며 만주의 북쪽에 치우쳐 있고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공간이 아닌데도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 있다. 지금의 중국 행정구역으로 헤이룽쟝성(흑룡강성)의 하얼빈이다.
이 도시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유는 아마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거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하얼빈인데 왜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을 찾았는지, 안중근 의사를 처음 조사한 것이 왜 러시아 군인인지 궁금해지는 부분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근대 하얼빈의 역사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이뤄진 곳
하얼빈은 유럽풍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하얼빈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것이 러시아, 그리고 소련인 것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가 하얼빈에 관심을 둔 배경은 만주의 철도 부설을 계획하면서다. 1895년, 삼국간섭을 계기로 중국 내 철도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는 만주리에서 하얼빈을 지나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동청철도, 그리고 하얼빈에서 출발해 창춘(장춘), 센양(심양)을 거쳐 대련에 이르는 남만주철도의 부설권을 얻은 것이다. 이 노선의 중심 도시는 하얼빈이다.
러시아가 하얼빈을 철도의 중심으로 생각한 배경에는 하얼빈이 가진 지리적 특성에도 있다. 송화강이 지나는 항구 도시라는 점이다. 송화강은 아무르강, 그리고 우수리강을 통해 러시아 우수리스크와도 연결된다. 참고로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흑룡강으로 부르며 이 지역의 성 이름인 흑룡강성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송화강을 끼고 있던 조그마한 어촌이던 하얼빈은 이때부터 큰 변화를 겪었다. 러시아는 직접 하바롭스크에서 건축 자재를 수상 교통로로 이송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유럽식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밀려 남만주철도, 그리고 다롄과 뤼순을 일본에 넘겨줬지만, 하얼빈에 대한 지배권은 유지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3만 명 이상의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는 도시였던 하얼빈은 1917년까지 제정러시아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이 시기는 일본 역시 러시아와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전쟁의 여파는 없었고, 하얼빈은 국제도시로서 면모를 갖췄다. 대략 53개 민족, 44개 언어권의 사람이 모여들었고 19개 나라의 영사관이 들어섰다.
하얼빈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 하얼빈에는 제정러시아를 지지하는 러시아인이 모여들었다. 1911년 4만 명 정도였던 하얼빈의 러시아인 수는 1917년 이후 급격하게 증가해 15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곧 소련이 1924년, 하얼빈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며 중국 군벌의 영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35년에는 동청철도마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에 매각하며 러시아, 소련의 영향력은 완전하게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하얼빈의 역사 배경을 이해하면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하얼빈은 이 시기에 러시아의 조차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하얼빈에서 제일 먼저 찾는 곳은 바로 하얼빈역이다. 옛 역의 건물을 다시 꾸몄으나 역사 정면 부분은 1903년 건축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안중근 의사가 찾았을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하얼빈역 건물 한쪽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역 건물 일부분을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기념관의 전시물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념관 가장 안쪽에 있는 대형 유리창에서 보이는 전경이다. 유리창 너머에는 하얼빈역의 1번 플랫폼이 있다. 플랫폼 바닥에는 두 개의 표식이 있는데 삼각형으로 표시된 부분이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쏜 곳이고 사각형으로 표시된 부분이 이토가 총을 맞을 당시 서 있던 곳이다. 곧 유리창 너머로 우리의 독립운동, 독립전쟁 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꼽히는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다.
하얼빈역을 보았다면 다음 일정으로 자오린 공원으로 가면 좋다. 한자로 읽으면 조린 공원이 며 옛 이름은 하얼빈 공원이다. 하얼빈 공원은 안중근 의사의 유언에 나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사형을 선고받은 뒤, 죽으면 자신의 시신을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우리나라가 독립했을 때 다시 우리나라로 옮겨달라는 내용이다. 안타깝게도 뤼순 감옥 근처에 있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는 거사 직전 조도선, 유동하와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관 역시 하얼빈 공원 옆에 있었다. 하얼빈 공원은 일본 패망 이후 중국 동북 지역의 항일 장군인 이조린의 무덤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붙여 조린공원이 되었다. 공원 안쪽에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새긴 서비가 있다. 앞에는 ‘청초당’, 뒤에는 ‘연지’라고 쓴 글씨이다.
김동삼·남자현 선생의 흔적도
하얼빈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가 있으니 바로 김동삼 선생, 그리고 남자현 선생이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며 일본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김동삼 선생은 항일 공작을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고, 이때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김동삼 선생은 평양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 그리고 서울의 경성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4월, 경성 감옥에서 순국했다. 만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죽음이지만 일제의 눈이 두려워 장례를 치르지 못하자 한용운 선생이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심우장으로 옮겨 와서 화장하고 그 재를 한강에 뿌렸다.
경상북도 영양 출신인 남자현 선생은 남편인 김영주 선생이 의병 활동 중에 전사하자 직접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남자현 선생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기도 했다. 하얼빈에서 김동삼 선생이 체포되자 구출 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이를 국제연맹에서 조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기도 했다.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마저 별다른 성과가 없자 1933년, 만주국의 일본 전권대사인 무토를 제거하기 위해 권총을 지니고 장춘으로 가려고 준비하던 중 하얼빈 교외에서 일본 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체포됐다. 일본 영사관 유치장에서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했다.
하얼빈은 일제강점기, 먼 곳에 있는 중국의 도시였지만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김동삼 선생, 남자현 선생을 기억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일본 관동군의 악명높은 생화학 무기를 준비하던 731부대가 있었던 곳도 바로 하얼빈이다. 하얼빈 외곽에 있던 이 부대의 부대장은 이시이 시로라는 인물로, ‘이시이 부대’로도 불렀다. 일본은 세균전을 위해 페스트균을 비롯해 말라리아, 유행성출혈열 등 세균 배양과 세균 폭탄 제조 등을 맡았던 부대다. 이를 위해 실험대상자가 될 사람이 필요했다. 널리 알려진 마루타다. 마루타는 통나무를 뜻하는 일본어로.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 등을 마루타로 썼다. 1936년 부대가 세워진 이후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약 30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731부대와 관련해 잔인한 사진이 많이 있지만, 대체로 731부대와 관련이 없거나 사진 설명 내용에 틀린 것이 많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731부대가 자신에게 불리한 사진을 최대한 없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하는 데 쓰여야 할 의학지식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 전쟁,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의 잔인함을 이해하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얼빈은 익숙한 지명과 달리 아직은 낯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근대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우리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