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로 오려내 오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골목을 몇 군데 알고 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자리한 모디카, 페루 쿠스코의 새벽 골목, 붉은 승복을 입은 노비스들로 붐비는 루앙프라방의 골목과 노란색 트램이 댕댕거리며 달리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골목 등이 그곳이다.
이 리스트에 에티오피아 하라르(Harar)가 더해졌다. 에티오피아 동부에 자리한 이 도시는 지금까지 다녀본 골목 가운데 가장 찬란했고 눈부셨다. 세상의 모든 색을 그 골목에서 만났다.
중세 성곽도시로 떠나는 시간 여행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에서 디레다와(Die Dawa)까지 비행기로 한 시간, 디레다와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를 가면 하라르(Harar)에 닿는다. 도시에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에티오피아와는 약간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상자 같은 직사각형의 건물들과 화려한 문양의 첨탑, 벽과 처마에 새겨진 섬세한 문양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시작해 곤다르·랄리벨라·진카·아바르민치·하와사·짐마·봉가 등 지금까지 여행했던 에티오피아의 다른 도시에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사람들의 생김새도 약간 달랐다.
팔다리가 늘씬한 9등신의 모델 몸매는 여전했지만, 이목구비가 더 또렷했다. 눈은 더 깊었고, 코는 한층 오뚝했다. “하라르는 이슬람 도시야. 주민들도 암하라족(Amhara) 이외에 소말리아계 사람들도 많아.” 에티오피아 여행 내내 함께했던 가이드 데쓰(Dess)가 설명해 주었다.
주민의 90%가 무슬림인 하라르는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10세기에 지어진 3개의 성전을 비롯하여, 82개의 모스크가 있어 이슬람교의 ‘제4의 성지’로도 여겨진다. 길을 걷는 여성들 대부분은 히잡을 두르고 있고, 남자들은 투피(tupi, 무슬림 남성이 착용하는 모자)를 쓰고 있다.
하라르는 성곽도시로도 불린다. 13세기 하라르의 통치자 누르 이븐 무자히드(Nur ibn Mujahid, ?~1567)는 오로모 부족과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총길이 3,334m의 성곽을 건설했다. 16세기에 이르러 완성된 이 성곽의 높이는 약 3.6m에 이른다.
‘주골’(Jugol)이라고 불리는 이 성곽 안에 오직 하라르에서만 볼 수 있는 집들과 골목이 있다. 성곽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5개의 성문을 통과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견고한 이 성곽 때문에 하라르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도시국가로 발달했고,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프리카·중동·인도의 중계 무역지로 번성한다. 그리고 1887년 메넬리크 2세 황제에 의해 에티오피아 영토로 통합되고, 1902년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를 연결하는 철도가 인근 도시인 디레다와를 지나가게 되면서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런 표현은 좀 진부하지만, 성곽 안으로 들어서면 정말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시계의 태엽을 300년 전쯤으로 되돌린 것 같다. 성문 하나를 지나왔을 뿐인데, 나귀를 타고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이 돌아다니는 푸른색 골목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나이키 에어맥스를 신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시간 여행자의 정신을 깨우는 것은 가이드 데쓰의 목소리다. “이봐, 초이(Choi). 정신 차려.” 그가 내 옆구리를 툭툭 친다. “일단 시장으로 가보자고.”
색깔보다 화려한 사람들의 미소
“와우!” 시장 입구부터 말문이 막혔다. 붉은색·초록색·푸른색·주황색 등등 화려한 원색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갖가지 향신료와 야채를 파는 좌판을 펼쳐 놓고 있다. 그 앞을 같은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여인들이 지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지에 가면 그 도시를 반드시 달린다고 하는데, 나는 여행지에 가면 반드시 그곳의 시장에 간다.
그래야만 그 도시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그렇다. “데쓰, 사진 찍어도 될까? 이 사람들 사진 찍히는 거 싫어하지 않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묻자 데쓰가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알기론 전 세계 포토그래퍼들이 이곳에 사진 찍기 위해 온다더군. 뭐 한두 컷 찍는 거야 괜찮지 않을까?”
예전엔 숨어서라도 어떻게든 사진을 찍곤 했지만, 이십 년 가까이 여행을 해온 지금은 억지를 부려가며 찍지 않는다. ‘못 찍으면 그뿐이지’하는 마음가짐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피사체의 마음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여행이 다른 이들의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하라르 사람들은 우호적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소를 지어주었다. 찍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어떤 여인들은 일부러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햇빛이 드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기도 했다. 자, 찍어봐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가만히 셔터를 눌렀다.
시장을 나와 골목을 걸었다. 세상의 여느 골목이 그렇듯, 하라르의 골목에서도 아이들이 동양의 여행자를 가장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어느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친구들을 데리고 나와 렌즈 앞에서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해주었다.
분홍색으로 칠해진 골목의 어느 구멍가게 앞에서는 졸업식을 마친 소년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초콜릿을 얻어먹기도 했고, 푸른색으로 칠해진 어느 길거리 옷 수선 가게 앞에서는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데쓰는 몇 발짝 떨어져서는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세상에는 하라르의 역사를 궁금해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골목에서 웃고 떠들며 사진이나 찍으며 여행하는 인간도 있는 법이지.
그래도 취재는 해야지 하는 생각에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데쓰, 왜 이곳의 택시들은 다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지붕만 흰색이지?”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데쓰는 “굿 퀘스천”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곳의 이슬람 사원과 집들이 파란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있기 때문이지. 그 색깔에 맞춘다고 택시도 그렇게 칠한 거야.”
하라르는 150년 전까지 이슬람교도가 아닌 외국인에게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교도가 성곽 안으로 들어오면 도시가 멸망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55년 영국군 장교 리처드 버튼이 이 도시에서 살아 나간 최초의 외부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천상의 맛을 가진 커피
“이봐 초이, 커피 한잔해야지.” 데쓰가 말했다. 맞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로 알고 있는 ‘에티오피아 하라’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된다. “한국의 커피 전문가들은 풍부한 과일 맛과 달콤함, 그리고 거친 흙 맛의 조화가 하라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하는데…, 데쓰 맞아?” 하고 물으니 데쓰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맛있어.” 데쓰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하라르 사람들은 세상의 커피를 하라와 그 외의 커피로 구분한다고 한다. 그만큼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아참, 데쓰에게 한국에서는 하라 원두 100g이 1만 원 정도의 가격에 팔린다고 하니 ‘오 마이 갓’을 세 번이나 연발했다. 하지만 하라르 시장에선 상상도 못 할 싼값에 살 수 있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도 이곳 하라르에 왔다. “시인이 되기 위해 가능한 방탕하게 살겠다”라고 선언했던 그는 동물 가죽 무역상으로 이곳에 도착해 무기 거래상으로 직업을 바꿔가며 이곳에 11년 동안 머물렀다. 그가 판 무기는 1896년 에티오피아가 아드와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을 물리치는 데 활약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무역 목록에는 커피도 들어있었고 자신의 커피 가든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끝없는 사랑이 영혼 속에 솟아나리라.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여인을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 랭보의 시 ‘감각’ 중에서
랭보의 시를 읊조리며 커피를 마시는 하라르의 저녁. 이런 풍경, 이런 경험들이 사실 아무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결국 희미한 기억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즐거운 것이 나중에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지금 즐겁지 않으면 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거기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하고 누군가 물을 때마다 ‘일단 가보세요. 거기엔 거기만의 즐거움이 있으니까요’하고 대답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