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망치고 싶어 교단에 오르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교단에 서는 가장 큰 이유, 그리고 교단을 지키는 힘의 원천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성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보람이다. 그런데 학생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함에도 반대의 결과가 나와 비판을 받는 교사들이 있다. 왜 그럴까?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면서 실은 우울증을 심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사람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교수법을 비롯한 교육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으며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고, 다른 교사들을 자주 만나 그들의 교수법과 생활지도법을 열심히 배우며, 신문기사도 교육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보고, 그 기사를 통해 현실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제시된 대안들을 실천에 옮기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아이들을 잘 지도하는 훌륭한 교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말 그럴까? 이러한 선생님은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법만 배우고, 엉터리 선생님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에 자신의 의도와 달리 엉터리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엉터리 선생님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 역으로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우연히 마주친 글을 읽다가 떠올라 발전시킨 것이다.
교육 주제 이외의 책을 넘봐서는 안 된다
첫째, 교육 관련 주제의 책만 읽어야 한다. 만일 교육 이외의 폭넓은 독서를 하게 되면 그의 시야가 넓어져 아이들에게 폭넓은 세상을 소개하며, 꿈을 심어주는 교사가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슴 뛰는 꿈을 심어주면 아이들은 열정적으로 공부하며, 크게 성장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아이들을 망치는 교사가 되고 싶다면 절대로 교육 주제 이외의 책을 넘봐서는 안 된다. 어렸을 때 읽었던 우화 중에 ‘소가 된 게으름뱅이’가 있다. 잘 알겠지만,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다.
밥 먹고 자기만 하면 소가 된다고 놀려도 듣지 않던 게으름뱅이가 있었다. 오히려 소가 되면 풀만 뜯어먹고 느긋하게 살 수 있으니 좋겠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을 소로 만들어서 팔아먹는 할아버지의 꼬임에 빠져 소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게으름뱅이를 한 농부에게 팔면서 “이 소는 무를 먹으면 죽으니 절대 무를 보여주지도 마시오”라고 이야기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가 게으름을 피우면 농부가 채찍으로 때렸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게으름뱅이는 죽으려고 했는데, 마침 우연히 무를 보게 되자 노인이 했던 말이 생각나서 죽을 결심을 하고 무를 씹어 먹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가죽과 소머리 탈이 벗겨지고 사람으로 돌아왔다.
무를 먹으면 소가 죽고 다시 사람이 될 수 있다. 교육 이외의 책을 읽으면 엉터리 교사가 죽고 훌륭한 교사가 살아난다. 훌륭한 교사가 되겠다면서 교육 관련 책만 읽고, 시간을 탓하며 그 이외의 책은 잘 읽지 않는 교사는 죽을까 두려워 무를 먹지 않는 소와 같다. 무를 먹어야 사람이 되듯이 교사는 교육 이외의 다양한 세상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학생들을 잘 이끌 수 있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가르칠 내용을 소재로 하여 학생들을 만나 그들을 세상으로 안내하는 안내자이다.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을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맥락과 연결시켜 주고, 학생들이 미래를 꿈꾸며 대비하도록 이끄는 지도자이다. 이 지도자가 인류 문화의 거대한 흐름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면 제자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교육에 대한 기초 지식이 탄탄하지 않으면서 신변잡기식의 글만 다양하게 읽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독서활동이다. 폭넓은 식견을 갖춘 지혜로운 자가 된다면 수업을 통한 학생들과의 만남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고, 학생들이 보다 균형 잡힌 시야를 갖도록 이끄는 훌륭한 교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리되면 원하는 엉터리 교사가 될 수 없으므로 각별히 유의(?) 해야 한다.
교육 이외의 문제에 눈과 귀를 닫으라
둘째로 지켜야 할 것은 교육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고, 이야기 소재로도 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대생들은 캠퍼스에서도,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도, 애인을 만나서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교육이야기를 한다는 농담이 있다. 대부분의 교사는 더 심할 것이다. 아무리 다른 주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더라도 이야기 나누다 보면 결국 학교 이야기, 학생 이야기로 돌아가고 만다. 이는 그만큼 교육에 진심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는 엉터리 교사가 되는 지름길이다.
교육문제는 대부분이 사회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한 아이의 문제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아이의 가정 배경만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아이를 소홀히 하는 이유를 더 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적 관점만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예술적 관점에서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더 기대한다면 교사는 교육문제만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환경 등 사회 제반 이슈에 대해서도 폭넓게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이상하게 확대하여 우리나라 교사들의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것은 엉터리 교사가 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교원들이 교육 이슈만 너무 천착할 경우 원인 진단을 잘못하고, 그 결과 잘못된 처방을 할 수도 있다. 내리막길이 오르막길인 줄 알고 가속페달을 밟았다가 사고를 당하는 ‘도깨비도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교육에서 벗어나 교육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한다.
선생님들끼리 티타임을 가질 때에는 특히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 나누길 기대한다. 세상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는 선생님을 부정적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교육 이슈에만 관심을 두는 자신이 오히려 엉터리 교사가 될 수 있음도 유의하자. 물론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사적 관심사만 주로 이야기 소재로 삼는다면 이 교사는 ‘엉터리 교사’는커녕 ‘가짜 교사’가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느 주일날 신부님께서 기독교인인 여성들은 부엌에서 벗어나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강론을 하셨다. 자기 가족과 자기가 속한 성당에 대한 헌신에서 더 나아가 자기 집 밖 세상사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을 교사에 대입해 보자. 교육 이슈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학교 밖의 심각한 사회적 이슈에도 관심을 두고 해결하기 위해 참여할 때 진정한 교육자가 될 수 있다.
엉터리 교사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치적 중립을 비롯한 많은 제약을 방패 삼아 교육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으라. 한편으로는 법적 투쟁을 통해 정치적 제약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규정 내에서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현실 개선에도 관심을 가졌다가는 자칫 엉터리 교사의 반열에 끼지 못할 수 있다.
교사끼리만 소통하고, 친구를 맺자
셋째로는 가능하면 교원은 교직 종사자 이외의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사도 주로 자기 직종 종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자기의 고충을 하소연하고, 갑질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교사를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한 사회와 국가를 원망하며 동지애를 느낀다. 그 결과로 부모나 다른 집단의 바람은 비현실적이고 과도하다고 느끼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의 역할, 월급에 상응하는 수준의 교사 직무수행에 맞춰 교직생활을 하면 원하는 엉터리 교사가 될 수 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며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점차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믿음이 커진다. 이렇게 하면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집단사고란 ‘응집성이 강한 소수로 구성된 정책결정은 각자의 목표나 생각, 가치가 반영되지 못하고 하나의 동일한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의사결정 성향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면 의사결정과정에서 동질성을 추구(concurrence-seeking)하는 경향 때문에 의사결정의 민주성·타당성·검증 노력을 훼손하는 결과가 나온다.
‘집단사고’라는 개념은 1972년,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가 그의 저서인 <집단사고에 의한 희생들(Victims of Groupthink)>에서 피그만 침공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하며 만들어 낸 개념이다.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지면 교사 집단과 다른 관점을 가진 타 집단의 관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고, 그들을 바보 취급하며 그들에게 분노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점 교사 집단의 사고에 갇히게 되면, 사회와는 동떨어진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 관점을 가진 교사들은 아이들 지도나 학부모와의 소통에서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육아휴직 후 교사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학부모들이 모인 육아카페에 가입한 제자가 찾아왔다. 그 카페에 올라온 교사에 대한 학부모들의 글을 보며 충격을 받았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공감이 되며 때로는 분노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빌게이츠는 성공한 기업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 점심식사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교사들도 동창회·동호회·종교단체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나 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임에 자주 나가게 되면 제3의 시각에서 교직을 바라보거나, 폭넓은 시야를 갖춘 사람이 됨으로써 원하는 ‘엉터리 교사’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각종 SNS를 할 때에도 가능하면 교사끼리만 소통하고, 교사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생각이 유사한 사람들과만 친구맺기를 하고, 집단을 만들어 소통해야만 엉터리 교사가 될 수 있다. 엉터리 교사로 남고 싶다면 교직 종사자 그중에서 특히 자신과 생각이 유사한 사람들만 만나서 자신의 시야와 생각의 폭이 넓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위의 세 가지를 잘 실천하면, 어쩌면 특별히 유의하지 않아도 저절로 실천이 될 것이므로 손쉽게 원하던 엉터리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분야의 책과 글을 읽을 때, 나와 동일 직종의 사람들과 만나서 늘 유사한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 나눌 때, 더구나 나와 생각이 유사한 사람들과 소통할 때에는 크게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 뇌는 가능하면 편한 길을 택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어서, 교사들이 크게 애를 쓰지 않아도 위의 세 가지는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엉터리 교사가 되지 못할까 걱정되거든 위의 세 가지를 늘 기억하며 실천에 옮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