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생각나는 인물,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던 조선을 구했던 영웅. 영화 ‘명량’,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 시리즈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에게 통쾌함과 안타까움을 줬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4월 28일에 태어났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은 아주 많다. 특히 부산에서 목포에 이르는 남해안을 따라 가면 어디서든 만나는 것이 거북선이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다.
서울에 자리 잡은 생가터
우리는 이순신 장군 하면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현충사를 생각한다. 그러나 아산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 아닌 처가였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혼인한 남자가 처가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 선생의 아버지 이원수가 처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살았으며, 이이 선생이 오죽헌의 몽룡실에서 태어났다.
인현동의 옛 이름은 건천동이다. 인현동이라고 하면 서울시 중구 인현동 2가와 예관동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이곳 고개에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이 살았다고 해 ‘인성붓재’ 혹은 ‘인성부현’, ‘인성현’이라 불렀으며, 줄여서 ‘인현’이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세 살 위인 유성룡과 가까이 지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그가 매우 영특하고 활달해서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겨 했는데,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라고 적혀 있다.
을지로3가역 7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명보아트홀 방향으로 가다 보면 인도 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리’라고 쓰여 있다. 그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다 보면 명보아트홀이 나오고, 앞에는 ‘이순신 장군 생가터’라는 표지석이 덩그러니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가 아니다. 실제는 이곳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을지로교회 옆에 있는 신도빌딩이라고 한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를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더구나 생가터 앞에 주차하는 경우가 있어, 생가터를 찾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가 이처럼 소홀히 관리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인간 이순신 면모 엿볼 수 있어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 목포에서 인천까지 서해안 고속국도가 건설됐다. 고속국도를 달리다 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바다를 가로지른 서해 대교와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12척의 배를 가지고도 바다를 지키고자 했던 이순신 장군의 혜안이 보이는 듯했다. 장군이 바다를 중시했듯이 오늘날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하니 말이다.
국도를 따라 이순신 장군이 자라고 잠들어 있는 아산시로 향했다.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기슭에 장군이 잠들어 계신다. 나라를 구한 성웅의 묘라고 하기에는 호화롭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원래 장군의 묘는 경상남도 남해 노량, 즉 현재의 충렬사 자리에 잠시 안치됐다가 사령부가 있는 고금도로 옮겨졌다. 이듬해(1599) 아산으로 옮겨져 2월 11일 금성산 밑에 장례를 치르고 15년 뒤인 광해군 6년(1614)에 현재의 자리인 어라산으로 옮겨 부인과 함께 잠들어 계신다.
장군의 묘소에서 약 9km 떨어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에는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다. 숙종 32년(1706)에 이 고장 선비들의 힘으로 사당이 세워졌고, 다음 해 왕이 현충사란 현판을 내렸다.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잠시 쇠락했으나,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국민의 뜻을 모아 1932년에 다시 지어졌다. 시대를 초월해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처럼 현충사가 성역화된 것은 1966년 이후이며, 사적 제155호로 지정돼 있다.
현충사의 중심은 꼭대기에 있는 현충사다. 청기와 집으로 된 사당 현충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정창섭, 문학진 작가의 작품, 장군의 일생을 담은 십경도가 있다.
현충사 서남쪽 아래에는 유물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기념관이자 국립 박물관으로 2011년 4월 28일 충무공탄신일을 기념해 공식 개장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를 비롯해 칼, 가족과 친척에게 보낸 편지인 서간첩이 있다. 칼은 1594년 4월 한산도 진중에서 태귀연, 이무생이 만든 것으로 크기가 197.5cm나 되고, 비천상 무늬와 자신의 의지를 시로 나타낸 시구가 있다.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이 밖에 임진왜란 때 쓰던 무기인 비격진천뢰, 조총, 천·지·현·황자포 등의 대포, 화살, 거북선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발길을 돌려 장군이 사시던 집으로 향했다. 미음 자(ㅁ) 형으로 된 기와집인 장군의 집은 현충사가 성역화되기 전인 1966년까지 후손들이 살았다. 아담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던 장군의 숨결이 느껴지는 집이다. 이 집은 원래 처가였으나, 부인 방씨가 외동딸이었기에 충무공의 후손들이 살았다. 집에서 동쪽으로 50미터쯤 가면 장군께서 궁술을 연습하던 활터와 기마술을 갈고 닦은 기마장이 있다. 활터에서 동쪽으로 가니 셋째 아들 이면공의 무덤이 있다. 장군이 남해안에서 일본군을 계속 무찌르자, 일본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아산에 있던 장군의 가족을 볼모로 잡으려고 했다. 이때 가족을 돌보던 셋째 아들 면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임을 당했다. 아들의 죽음을 안 장군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으니, 가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더 알아보기)
2023년에 상영된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면 명나라 해군 총대장인 진린은 왜군의 회유로 이순신 장군이 아들 이면을 죽인 왜군에 대한 복수 때문에 끝까지 전투를 고집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알게 된 진린은 결국 출전하였다. 조명연합함대는 200여 척이었지만, 왜군은 최정예 부대인 시마즈 부대를 비롯한 500여 척이었다. 어두운 밤에 격전이 벌어져 이순신 장군의 전투 매뉴얼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적을 분별하기 위해 근접전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과 등자룡 등 여러 지휘관이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근접전을 벌이며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벌인 까닭은 무엇일까?
(해설은 다음 회에)
전회 해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한국, 중국, 일본이 한자문화권으로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기에 힘을 합쳐 서양의 침략에 맞설 수 있으며 함께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은 을사늑약의 강압적 체결로 이미 명분과 실리가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안중근 의사도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이 생겨 대한민국을 지킬 방법을 강구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