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에세이, 한 페이지] 50년 만의 수학여행

2024.12.09 09:00:52

2024년 9월 28일. 1957년생인 친구들 23명이 1939년생 정주영 선생님과 1942년생 사모님을 모시고 대천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4년 5월에 수학여행을 다녀왔으니 실로 50년 만의 수학여행이었습니다. 이제는 대부분 현역에서 은퇴해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잔주름도 보였고, 머리가 허옇게 된 영감님도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머리가 됐어도 아직 동안을 유지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우리 친구들은 매년 스승의 날 즈음이면 은사님 내외를 모시고 저녁 식사하는 것을 졸업 후 올해까지 한 해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올해도 스승의 날 식사 모임을 하던 중 어느 친구가 졸업여행을 제안했고, 뜻을 같이한 친구들이 은사님의 연세를 감안해 우리 모교가 있는 송탄에서 두 시간 내외에 도착할 수 있고 걷기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대천 유람선 탑승, 예산 수덕사 코스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우리 모교는 평택 송탄에 있는 효명고교로 재학할 당시에는 실업계와 인문계가 같이 있는 종합고등학교였습니다. 실업계인 기계과, 건축과, 전자과, 상과가 있었고 인문계인 보통과가 한 반씩 설치돼 있어 50여 명의 친구들은 좋으나 싫으나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반에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은사님은 교직 인생의 첫 번째 담임으로 우리 반을 맡으셨고, 3학년까지 2년간 담임을 하셨다는 특별한 인연으로 선생님을 결혼식 주례로 모신 친구도 있습니다.

 

스승의 교직 인생 함께한 제자들

 

우리 반 친구들은 선생님의 교직 인생과 그 후의 삶에서도 늘 함께했습니다. 선생님의 회갑연과 정년 퇴임식도 우리들이 중심이 돼 준비했고 칠순 잔치, 팔순 잔치도 마련했습니다. 그런 선생님이셨기에 자연스럽게 ‘다시 가는 졸업여행’ 이야기가 나왔고 많은 친구가 함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댁으로 모시러 가보니 사모님께서 손수 군계란 한판을 만들어 놓으시고, 50년 전 수학여행 가는 그때 모습처럼 상기되고 들뜬 모습으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이가 여행 가서 제자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며 어제 학교 운동장을 다섯 바퀴나 돌았어요.”

 

여행은 나이가 많건 적건 기대되고 즐거운 것, 기다려지는 것인가 봅니다. 더군다나 60대 중반의 제자와 80대 후반의 은사님 내외를 모시고 함께 떠나는 여행이니 오죽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여행 중에 사용하지는 않으셨지만 우리는 혹시나 해서 휠체어도 준비해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대천으로 향하면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너희들 같은 제자는 아마 없을 거야. 나는 친구나 지인들에게 너희들 같은 제자가 있다는 걸 자랑하고 있어. 이제 나이가 들어 너희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별명을 생각하면 이름이 떠오르곤 하지.” 그리고 한 말씀 더하셨습니다. “내가 겨우내 건강관리 잘할 테니 내년 봄에 나 빼놓지 말고 꼭 데리고 가야 돼!” 우리는 박수와 환호로 선생님께 답을 드렸습니다.

 

대천 앞바다를 유람선으로 한 바퀴 돌아본 후에 예약해 놓은 횟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얽힌 추억담이 쏟아졌습니다. 한 친구가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지를 않았어. 고등학교 3학년 4분기 수업료를 내지 못했으니 졸업식에 가도 졸업장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상황을 알게 될 담임선생님을 대면할 수 없어서.”

 

그런데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졸업증명서를 발급받으러 모교 서무과로 갔더니 순순히 졸업증명서를 발급해 주더랍니다. 당시에는 수업료 미납 상태인 졸업생이 졸업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내지 않은 수업료를 납부해야 발급을 해줬습니다. 서무과에 물어보니 미납된 수업료가 없다고 하며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대납하신 걸로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합니다.

 

저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5년 10월 저는 육군사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1차 합격을 하고 신체검사와 건강검진을 마친 후 최종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삼군 사관학교 최종 합격자 명단이 주요 일간지에 발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육군사관학교 교수 출신이셨던 까닭에 육사에 1차 합격한 저와 다른 한 친구를 교장실로 부르셔서 체격이 왜소하고 약해 보이는 저한테는 “이제부터 공부보다 체력을 높이는 일에 힘써!” 하셨습니다. 그런데 1976년 1월 6일 최종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었습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담임 선생님을 뵈러 가니 대뜸 “야, 너 인천교대 가!” 하셨습니다.

 

신문 보도를 보시고 이미 저의 진로까지 결정해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교대를 마치고 1978년 7월부터 40년 3개월의 교직을 마치고 교장으로 퇴직해 행복한 인생 후반기를 살고 있습니다. 교사로 근무하는 내내 은사님은 제가 ‘가르치는 스승’으로 살아가도록 이끈 롤모델이셨고 교직 멘토이셨습니다. 은사님은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이셨습니다.

 

“내년엔 더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

 

또 다른 친구가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졸업할 때 미납한 수업료를 담임 선생님께서 대납하신 것을 알고 졸업한 후에 첫 월급을 받은 날 선생님을 찾아뵙고 드리려고 했더니, “내가 너한테 받으려고 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하셨답니다. 그 친구 가정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겠지요.

 

또 한 친구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친구는 선생님을 떠올리면 이 한마디가 생각난답니다. “야! 쌀 한 말하고 3000원 가지고 우리 집으로 와!” 방학이 되면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신혼집 방 하나에 제자들을 합숙시킨 것입니다. 그야말로 소수 정예 개인 과외를 자청하셨던 것입니다. 방학 한 달 과외 수업비가 쌀 한 말에 반찬값 3000원이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과외비가 아니라 각자 아주 싼 그러나 맛있는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는 생활비를 가지고 간 것입니다. 어린 딸 하나를 두었던 사모님은 원치 않게 무보수 하숙생을 친 셈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은사님 내외분은 이런 분이셨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60대 중반을 넘기는 오늘까지 우리 친구 중에 사별(死別)은 있어도 이혼(離婚)한 친구는 없습니다. 선생님보다 앞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제자가 있음에 가슴 아파하는 은사님, 아직도 노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제자에게 “언제 장가 갈 거야?” 일갈을 잊지 않으시는 은사님, 내년 봄에는 더 좋은 수학여행에 모시겠습니다.

이종석 전 평동초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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