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우리나라 중등교육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다. ‘고교학점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중등교육 정책 중 ‘고교학점제’처럼 오랫동안 일관되게 준비하여 실시한 정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실제 고교학점제의 전면 실시를 위해 국가교육과정까지 개정하여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전면적으로 실시되는 해이기도 하다. 고등학교의 변화를 위한 대표적 정책인 ‘고교학점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고교학점제의 전면 도입을 통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의 질적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고교학점제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려면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고교학점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짚어보고, 보완해야 할 사항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원초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고교학점제가 우리나라 중등교육의 대표 정책으로 추진할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교학점제’의 시작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 교육공약으로 제시되면서부터이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 가장 대표적인 교육공약이 ‘고교학점제’였고, 공약 이행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 교육정책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선택 교육과정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만 학교가 보유한 시설과 인적자원의 한계로 인해 학생들이 직접 선택하기보다는 학교가 개설할 과목을 정하는 방식이었을 뿐이다. 즉 ‘학점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현재 추진되는 ‘학생 과목 선택’ 개념은 이미 국가교육과정 문서에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사실 국가가 정책적으로 고교학점제를 추진하기 전에도 여러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과목 선택을 허용하며 운영해 왔다. 필자가 근무하는 민족사관고등학교만 하더라도 이미 1997년부터 학생 과목 선택제를 실시해 왔다. 결국 이는 새로운 교육정책이라기보다는 기존의 학생 과목 선택을 행정적·재정적으로 지원해 주면 되는 사안이었지 이것을 국가의 교육정책으로 할만한 담론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고교학점제 핵심은 ‘자유’와 ‘책임’
이러한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고교학점제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권을 부여하는 ‘자유’와, 자신이 수강한 과목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달성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권을 주되,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하여 학점을 받고, 이 학점을 모아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과목 선택권 보장’과 ‘선택한 과목 성취에 대한 질 관리’가 고교학점제의 요체이다. 그러나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많은 선택권을 보장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주 지역 내 학교를 중심으로 배정받는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운영체제상, 학생들은 선택할 수 있는 과목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근 학교와의 공동 교육과정 운영’, ‘학교 밖 교육과정’, ‘온라인 학습 플랫폼’ 등 다양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이 선택한 과목에 대한 성취 관리는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하다.
고교학점제 이전에 우리나라 고등학교에서 ‘과목 이수’와 ‘졸업을 위한 자격’에는 학업성취기준이 거의 없었다. 출석률이 2/3 이상이면 학업적인 기초역량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과목 이수가 가능했고, 졸업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고교학점제 도입 이후 과목 이수 및 졸업 기준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2/3 출석 기준은 동일하며, 추가적으로 수강한 과목의 성취 수준이 40%를 넘어야 한다는 조건이 생겼다. 그러나 이 조건은 매우 소극적이어서 실효성에 문제가 있다. 40%를 준수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사에게 달려있고, 혹 40% 성취 수준을 넘지 못한 학생에 대해서도 일정한 과제와 보충학습을 제공하면 이수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며, 국가 차원의 관리 장치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결국 ‘자유’에 따른 ‘책임’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선택’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 질 관리시스템
현재 국가교육과정에서 일반계 고등학교의 경우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을 포함해 15개 과목군에 146개의 고시 과목이 존재한다. 게다가 학교별 승인절차를 거쳐 개설할 수 있는 고시 외 과목도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의 수는 수백 개를 넘는다. 이렇게 다양한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과목 이수 기준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어렵게 도입한 고교학점제는 ‘다과목 피상교육’이라는 부작용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과목 개설을 국가가 엄격히 관리하듯, 과목 이수를 위한 적극적인 학력 관리 장치가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미국과 유럽의 고등학교에서는 고교 졸업 자격과 대학 입학전형 자격에 대한 질 관리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 바뀐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제도를 우리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에서 수강하는 과목인 프랑스어·전공과목1·전공과목2 그리고 철학은 학교에서 수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2학년 말과 3학년 말에 그 과목에 대한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즉 고교 졸업 자격이자 대학 진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응시하여 20점 만점에서 10점을 넘지 못하면 불합격 처리가 되는 데 이 시험을 국가가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교 전 과정에서 배운 과목을 하루에 보는 우리의 수능과는 달리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한 과목을 하루에 그것도 시험 시간이 4시간 이상이 된다. 시간만 보내면서 대충 공부해서는 이 시험에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IB의 고등학교 과정이 IBDP인데, IBDP의 수업관리와 평가방식은 우리 고교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IBDP는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2년간의 고교교육과정이다. 이 2년간에 학생들이 수강하는 과목은 6개 과목군에서 한 과목씩 총 6과목만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학생이 수강하는 과목은 6과목에 불과하지만, 학생이 수강한 과목에 대한 양적·질적 관리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이 수강한 과목의 실수업 시간1을 채워야 하고, 과목별로는 학교에서 치러지는 내부평가(IA)와 IBO에서 출제 및 평가를 하는 외부평가(EA)2에 응시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에서의 학문수행과 고등사고능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인식론(TOK)을 이수해야 하고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한 소논문도 제출해야 한다. 6개 각 과목별 점수는 7점 만점으로 총 42점 인식론과 소논문 3점을 합하여 45점 중 24점을 넘어야만 디플로마를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IBO 본부에서 명료한 기준과 절차에 의해서 관리 운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IB의 디플로마 점수는 전 세계 대학에서 그 결과를 신뢰하고 대입 전형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고등학교 교육의 흐름은 ‘소과목 심화학습’을 통한 고등 사고력 함양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런 역량을 갖도록 하기 위한 관리시스템을 국가적으로 범세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학점제는 세계적 고교교육의 흐름에서 볼 때 이제 겨우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을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학생들이 수강한 과목에 대한 질 관리방법을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즉 학생들이 고교에서 학습한 과목에 대한 이수방법과 졸업 자격을 분명하고 엄격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고 하는 것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우리가 개발하게 될 과목이수와 졸업인증제도를 K 디플로마라 명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K 디플로마’가 새로운 세계 교육의 표준이 되는 꿈을 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