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의 도깨비 여행

2025.06.23 15:54:09

초하 향기 짙어지는 유월 초, 남산팔각정의 나무 그늘 벤치에 아내는 내 무릎을 베게 삼아 지친 몸을 뉘고 있다. 가만히 잠든 모습을 보니 삶의 회한과 더불어 고생한 흔적이 얼굴이며 손등 곳곳에 묻어난다. 흰머리도 많아지고 주름도 늘어났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눈앞이 흐려진다.

 

 

올해로 결혼한 지 35년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파고를 겪었다. 시부모님 병시중과 몸져누운 일 등 숱한 사연은 아내를 힘들게 했다. 그런 고개를 넘어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지난 5월 초였다. 연휴 기간이 길어 모처럼 당일치기로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하니 서울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기차표는 매진이어서 6월 공휴일인 현충일로 잡았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나와 같이 서울에 가 본 기억은 까마득하다. 연애 시절에 잠깐 들린 기억뿐, 3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나 같은 경우 누나들이 서울에 살아서 학창 시절 방학이면 서울에 머물러 별로 낯설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부담이 된다. 결혼 후 첫째를 출산하고 3년 동안 몸져누운 후 다리 길이가 차이가 나서 치마를 입거나 예쁜 구두를 신을 수 없었다. 지금도 신발 한쪽에 두꺼운 밑창으로 높여서 걷지만, 오랫동안 걷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도 아내와 같이 가는 길이라 신이 나서 일주일 전부터 움직일 동선을 꼼꼼히 지도를 찾아 정보를 파악하였다.

 

현충일 새벽 4시다. 아내와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순천역을 향해 출발한다. 6시 25분 용산행 KTX를 타기 위해서다. 하지를 앞두고 길어지는 낮에 맞춰 해가 빨리 뜬다. 처음으로 KTX를 타보는 아내의 얼굴이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드디어 기차는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흐른다. 아내는 차창 밖 경치라도 보면 좋을 것인데 평소 건강이 안 좋은지라 냉방된 차 속이 춥다며 준비한 무릎담요에 긴소매 옷, 장갑에 마스크를 끼고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는다. 그렇지 생활고에 찌들며 살다 건강도 잃고 변변찮은 정장 한 벌도 없는 아내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린다.

 

아내는 길치다. 번잡한 도회에 가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린다. 청와대를 보기 위해 종로3가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릴 때까지 내 손을 꼭 잡고 따라다닌다. 혹시 미아가 될지 모른다고 걱정이다.

 

청와대 입구에 가니 인산인해다. 새 대통령이 청와대로 집무실을 옮긴다고 하니 이 기회가 아니면 못 본다고 관람 대기 줄이 1시간 이상으로 서 있다. 아내와 나도 그 줄에 함께 했다. 겨우 청와대 본관을 보고 나오니 지친다. 잘 정리된 정원과 나무들이 초여름 하늘에 기대어 소담스럽다. 그 배경에 사진을 촬영하려고 하니 지나는 인파로 인해 만족할 사진이 없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인파에 밀려 청와대를 나와서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간다. 아내는 경복궁이 처음이라 한다. 경복궁 역시 공휴일 관람 인파로 인해 낯설기만 하다. 외국인 관광객은 한복을 입고 초여름 날씨인데도 땀을 흘리며 걷고 있다. 향원정, 경회루, 사정전, 근정전을 돌아 광화문 앞에서 사진으로 기억을 남긴다.

 

 

이제 남산으로 갈 여정이다.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 시내 한가운데 빌딩 사이에서 음식점을 찾아 대충 점심을 때운다. 점심 먹는 내내 아내의 표정을 보니 지친 기색이 완연하다. 명동역에서 걸어서 남산 오르미까지 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케이블카 승강장에 내린다. 하지만 이곳 역시 대기하는 많은 인파로 인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적어도 1시간 이상 기다리는 줄이다. 나는 줄을 서고 중간중간 아내는 앉아 있으라고 권한다. 긴 기다림은 자신의 목적이 달성될 때 해소되는 법이다. 남산 정상 부근에 도착한다. 걸어서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지친 몸이지만 불어오는 바람과 파르르 떨리는 녹음의 소리가 상큼하다.

 

남산에도 역시 인파로 넘쳐났다. 도심에서 자연의 숨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리라. 이번에는 남산N타워 전망대로 가기로 했다. 이곳 역시 줄서기를 한다. 아내의 지친 표정이 더해진다. 기다림 끝에 전망대에 올라 서울 시내를 빙 둘러본다. 아내는 집들이 장난감 같다고 한다. 아내가 너무 지친 것 같아 자리를 찾아도 많은 사람으로 인해 어렵다. 다시 줄을 서서 기다림을 더하여 내려온다.

 

 

'힘들어 잠깐 눕고 싶어.' 아내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있었다. 마침, 벤치가 비워 팔각정 아래 나무 그늘 밑에 아내는 몸을 뉜다. 30여 분의 휴식이 아내는 꿀맛이었다고 조금 밝아진 얼굴이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사랑의 언약을 채운 형형색색의 자물쇠가 난간에 걸려 벽을 이루고 있다.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우리도 한 번 걸어볼까 하다가 무슨 연애하는 기간인가 하는 핀잔에 물러난다. 기다림 끝에 다시 내려온다.

 

방송에서 맨날 '명동 명동'하는데 한 번 가보자. 사실 그즈음 나도 당이 딸려 지쳐가고 있었다. 시원한 냉커피가 당긴다. 아내와 나는 걸어서 명동 입구의 한 카페에 들어간다. 매장 안에는 젊은 사람뿐이다. 백팩에 수건을 목에 걸고 사진기까지 들고 들어서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 부부에게 오는 느낌을 받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잠시의 충전이 기운을 회복시켜 준다. 시간은 돌아올 KTX 출발 시각 쪽으로 가까워진다. 이곳에서 다시 집으로 갈 동선을 핸드폰으로 보고 있는데 모처럼 여기까지 와서도 폰 보냐고 한다. 그래 우리도 젊음의 인파 속에 묻혀 보자. 아내와 나는 간판의 다양한 색 LED 불빛이 들어오는 거리를 걸으며 윈도 쇼핑을 한다.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액세서리나 다른 것을 골라보라고 해도 아내는 둘러보기만 한다. 돈도 쓸 줄도 모르는 바보다. 그리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스름이지는 명동역에서 우리는 다시 지하철 타고 용산역으로 향한다. 또다시 아내는 내 팔을 붙들고 따라온다. 길 잃을까 봐 걱정된다고 한다.

 

용산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KTX는 8시 조금 넘어 출발한다. 올라올 때는 밝아서 창밖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어둠에 물드는 불빛뿐이다. 아내는 또다시 춥다면 가져온 옷으로 완전무장을 한다. 그리고 피곤하여 지쳤는지 2시간 넘게 소리도 없이 잠에 취해 있다. 중간중간 정차할 때마다 아내의 얼굴을 본다. 이것도 여행이라고 따라나서 준 아내가 고맙다. 아내는 시간 나면 평일에 오면 복잡하지 않고 좋겠다고 한다.

 

 

밤 11시 가까이 순천역에 도착한다. 다시 1시간여 자동차를 달린다. 아내는 또 피곤한지 눈을 감는다.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며들 때마다 잠든 아내의 얼굴이 파리하다. 집 가까이 다가오며 차창을 연다.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다. 정말 오늘 아내와 한 오늘은 20시간의 도깨비 같은 사랑 여행이었다.

 

장현재 경남 남해초 교사 qwe85as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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