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_ 왜 여름, 왜 홋카이도인가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며 여러 곳을 고민했지만, 결국 홋카이도(Hokkaido, 北海道)를 선택했다. 일본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한국의 여름에서 잠시 벗어나, 조금은 다른 공기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홋카이도를 떠올릴 때 삿포로(Sapporo, 札幌)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삿포로 맥주, 삿포로 라멘, 겨울철 눈 축제가 유명한 바로 그 도시 말이다. 그러나 홋카이도는 삿포로 하나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 전체 면적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며 지리적으로는 혼슈(Honshu, 本州) 북단에서 훌쩍 떨어진 북쪽의 큰 섬이다. 바다와 산, 광활한 평야와 들판이 이어지며 일본 본토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빚어낸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도시들이 흩어져 있다. 신선한 해산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항구 도시 오타루(Otaru, 小樽), 농업과 낙농업이 발달한 도카치(Tokachi, 十勝) 평야, 그리고 여름의 화려한 색채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비에이(Biei, 美瑛)와 후라노(Furano, 富良野)까지…. 홋카이도를 여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도시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 같은 다채로운 풍경과 문화를 만나는 경험에 가깝다.
그 가운데 내가 선택한 여정은 삿포로·비에이·후라노였다. 삿포로는 신치토세 공항과 연결된 홋카이도의 입구이자 최대 도시로 여름철이면 대규모 맥주축제가 열려 도시 전체가 활기로 가득하다. 비에이와 후라노는 한국인에게도 투어 여행지로 잘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비에이는 언덕과 밭이 만들어내는 목가적 풍경을 자랑하며, 후라노는 보랏빛 라벤더와 형형색색의 꽃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도시의 활기와 자연의 고요, 축제와 풍경을 두루 경험하고 싶었던 나의 기대와 가장 잘 맞는 조합이었다.

삿포로 _ 음식과 도시, 그리고 개척의 흔적
인천공항에서 2시간 50분의 비행을 마치고 신치토세 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홋카이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JR 열차를 타고 삿포로역까지 이동하는 40여 분 동안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이미 한국과 다른 느낌이었다. 넓은 들판과 낮은 건물들, 그리고 어딘지 여유로운 속도감까지 말이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도심으로 들어서자, 의외로 깔끔하고 정돈된 도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는 넓었고, 건물들은 지나치게 높지 않아 하늘이 크게 보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둑판처럼 정돈된 격자형 도로망이었다. 이는 홋카이도 개척 당시 서구식 도시 계획을 도입한 결과로, 한국의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삿포로 도심 내 대표적인 공원인 오도리공원에 이르자 여름 햇살 속에서도 초록빛 잔디와 분수가 시원하게 반짝였다. 겨울에는 눈 축제가 열린다고 하지만 여름의 삿포로 역시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원 곳곳에는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직장인들,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 산책을 즐기는 노부부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공원 주변으로는 삿포로의 상징 중 하나인 시계탑이 우뚝 서 있어, 이 도시가 단순한 현대적 공간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을 함께 품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삿포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코 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징기스칸(ジンギスカン)’이라 불리는 양고기 구이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스스키노 지구의 한 징기스칸 전문점에서 처음 맛본 양고기는 단순히 ‘맛있다’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았다. 양고기 특유의 잡내가 걱정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신선한 홋카이도산 양고기는 잡내 없이 부드럽고 고소했다. 가운데가 볼록한 전용 철판에서 구워낸 양고기를 곁들인 채소와 함께 먹으니 그야말로 홋카이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맛이었다. 그 맛을 음미하며 ‘결국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재료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평야와 청정한 환경을 바탕으로 신선한 농산물을 길러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자·옥수수·멜론 같은 작물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농산물이다. 1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니조시장에서 맛본 우니·이쿠라(연어알)·털게 등 신선한 해산물들은 차가운 바다가 키워낸 홋카이도만의 선물이었다. 삿포로에서 마신 맥주 또한 홋카이도의 보리와 홋카이도의 물이 있어 가능한 맛이었다. 지리수업 단원 중 ‘기후와 농업’, ‘지역 특산물’을 설명할 때 항상 교과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는 직접 경험한 생생한 사례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도시 곳곳에는 개척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먼저 시계탑(時計台)은 오도리공원과 함께 삿포로의 얼굴로 불릴 만큼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19세기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 정부가 본토에서 이주민을 이끌고 홋카이도를 개발하며 세운 이 건물은 단순한 시계 기능을 넘어, 근대화와 개척의 시간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삿포로 맥주박물관에 들어서면 개척과 산업화의 궤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전시물들은 독일의 양조 기술자들이 전수한 맥주 제조법이 어떻게 홋카이도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근대 일본의 서구화 과정을 이해하는 살아있는 교육자료였다. 이곳의 풍경이 단순한 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근대 일본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름 홋카이도의 매력 _ 시원한 공기 속에서의 여유
“홋카이도는 겨울에 가야 제맛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눈 덮인 설경과 겨울 대표 축제인 ‘삿포로 눈 축제’가 가장 먼저 생각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여름의 홋카이도는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하다. 일본 본토의 여름이 우리나라보다 더욱 습하고 후텁지근하다면, 홋카이도의 여름은 선선하고 맑다. 당시 7월 말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았고, 저녁에는 25도 아래로 내려가 에어컨 없이도 충분히 쾌적했다. 비록 낮에는 햇살이 뜨겁긴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숨 막히는 더위는 찾기 어려웠다.
저녁에는 삿포로의 명물, 스스키노 네온사인 거리를 걸으면서 더위에 지치지 않고 천천히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국의 여름이었다면 금세 땀이 흐르고 숨이 막혔을 텐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발걸음이 가볍게 이어졌다. 오도리공원과 홋카이도 대학교를 걷는 낮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에 홋카이도를 찾은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오도리공원에서는 마침 ‘삿포로 맥주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긴 벤치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시원한 맥주잔을 부딪치며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현지인들 틈에 앉아 홋카이도산 맥주를 한잔 들이켰다. 낮 동안의 햇살로 데운 몸이 서늘한 맥주 한 모금으로 단번에 식는 느낌이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신 그 맥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여름 홋카이도의 상쾌한 공기와 활기찬 분위기까지 함께 담고 있는 듯했다.
‘여행지의 맛은 결국 그곳의 기후와 사람들의 삶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지리교사인 나에게 이런 기후와 경험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평소 수업과 업무에 지친 몸과 마음에 진정한 휴식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진짜 쉬었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먼저 무더위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비에이와 후라노 _ 풍경의 압도
삿포로에서 렌터카를 빌려 비에이에 도착했다. 작고 소박한 역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자, 흐린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푸르른 초원과 군데군데 심어진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펼쳐졌다. 비에이의 대표적인 명물 중 하나인 ‘세븐스타 나무’ 앞에서는 한동안 차를 세우고 서 있었다. 1970년대 일본 담배 ‘세븐스타’ 광고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진 이 한 그루의 커다란 참나무는, 지금도 언덕 위에서 든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 웅장한 모습은 단순한 나무라기보다는 비에이의 드넓은 초원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보였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은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이어 들른 곳은 사진작가 마에다 신조의 작품을 전시하는 탁신관(拓真館)이었다. 전시실에는 비에이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창밖으로는 하얀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흰 줄기의 나무들이 줄지어 선 숲길을 걸으니, 잠시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이곳에서는 풍경이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 예술과 감성으로 승화되는 순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어 만난 비에이의 명물 ‘크리스마스트리’ 또한 인상 깊었다. 이름처럼 외롭게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마치 겨울을 기다리는 듯 고요하게 서 있었는데, 그 풍경은 사진 속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청의 호수(青い池, 아오이케) 역시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물속에는 쓰러진 자작나무들이 고요히 잠겨 있었고, 특유의 푸른빛 수면은 날씨와 빛에 따라 미묘하게 색을 달리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방재 시설이지만, 지금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빚어낸 독특한 풍경으로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비에이와 함께 방문했던 후라노에서는 아쉽게도 시기상 7월 중순에 만개하는 라벤더를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을 거닐며 일본 사람들 특유의 세심함과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꽃밭 사이사이를 메운 색채의 조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원 예술 같았다. 특히 농장에서 먹었던 유바리 멜론과 라벤더 맛 소프트아이스크림은 후라노에서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 속에서 잠시 여행의 피로가 사라지는 듯했다.
풍경 너머의 이야기 _ 여행 후에 알게 된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
여행하며 늘 느끼는 것은, 풍경은 단순히 눈앞의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영민 교수님의 책 <지리학자의 인문여행>에서는 여행은 세 번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떠나기 전 상상 속에서 한 번, 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하며 한 번, 그리고 다녀와서 곱씹으며 또 한 번. 이번 홋카이도 여행 역시 그랬다.
돌아온 뒤 우연히 홋카이도가 원래 아이누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행 중에는 기념품 가게에서 본 독특한 문양이나 낯선 음악을 그저 ‘특이하다’고만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누 문화의 흔적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풍경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19세기 메이지 정부의 개척 정책으로 본토에서 이주민들이 몰려들면서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했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감탄하는 풍요로운 농산물과 목가적인 풍경이 만들어졌다. 비에이의 계단식 밭과 후라노의 라벤더밭은 모두 이런 개척 역사의 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산책의 목적으로만 방문했던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 대학교)가 근대 교육과 서구 농학을 도입한 실험장이었고,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클라크 박사의 말은 지금도 이 땅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결국 여행지 속에서 경험하는 음식과 풍경 뒤에는 언제나 역사와 문화가 함께 자리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을 이해하려는 시선이 더해질 때 여행은 비로소 깊어지고 의미 있게 남는다는 사실을 이번 여정을 통해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_ 여행의 여운
5박 6일의 홋카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홋카이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삿포로의 신선한 음식, 비에이의 초원과 나무들, 그리고 후라노의 정성스럽게 가꿔진 정원까지…. 이번 여행은 단순한 휴가가 아니라, 삶을 재충전하고 교육자로서의 시야를 넓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왜 홋카이도를 택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일상의 무더위와 바쁨을 잠시 벗어나 떠난 여행이었지만, 돌아와 보니 얻은 것은 단순한 시원함 이상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 역사적 깊이, 그리고 사람들의 세심한 삶의 태도까지 고루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평소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 달려가던 내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빠른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천천히 멈추어 서서, 그곳에 담긴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여행이 가르쳐준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홋카이도 이야기를 들려주면 모두 “나도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홋카이도 여행의 핵심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에요. 천천히,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어야 풍경 속에 담긴 이야기들도 보이거든요.”
결국 여행은 풍경을 보는 일이자, 그 풍경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홋카이도에서의 며칠은 나에게 ‘재료가 좋은 음식처럼, 배경이 깊은 여행이 진짜 맛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동시에 ‘삶도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남겨주었다.
언젠가 또 다른 계절에 다시 찾더라도, 이번 홋카이도 여행의 기억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더운 여름날이 찾아올 때면, 그곳의 선선한 바람과 고요한 풍경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