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 맺는 시간이었던 ‘3월의 기억’
그때를 기억하시나요? 3월은 우리 모두 설레고 긴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학급별로 학생 임원진을 선출하고 나면 교실 대청소와 환경미화를 했습니다. 우리는 1년의 서사를 짓는 공간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이 있던 시기에는 자율학습 도중에 교사는 학생 얼굴을 확인하면서 학생의 이름을 외우기도 하고, 학생의 교과 관련 질문에 답하기도 했습니다. 늦은 시간에 상담하러 오시는 학부모님들도 많이 있었지요. 이 모든 ‘함께 머무는 시간’은 ‘함께 공간을 만드는 경험’으로 ‘관계 짓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교사·학생·학부모 모두 서로를 존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각자 학원으로 갑니다. 요즘 우리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학원 시간을 고려해서 상담 일정을 정합니다. 예전에 교사의 상담 시간은 학생에게는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담임교사와 상담 후에 학생은 특별한 관심을 받고 기운을 얻은 듯 묘한 자신감으로 밝았지요. 이것이 바로 상담의 교육적 의미였습니다. 방과후 늦은 시간까지 상담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때를 기억하면서 지금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회한이 남습니다. ‘상담’으로 인해 학원 시간이 늦었다는 학부모의 항의성 민원 전화를 받은 경험도 있습니다.
3월은 모든 학교에서 1년을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학생도 교사도 모두 새로운 만남입니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궁금해하고 서로를 해석하면서 정서적·심리적 맥락을 맞춰갑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새 학기에 우리 아이가 만나는 담임선생님이 궁금합니다. 새 학기 학부모 상담은 학부모와 교사가 학생 성장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기회입니다.
대부분 학교가 3월 셋째 주에 학부모총회를 하며 학부모 상담이 시작됩니다. 학부모 대상 공통 연수와 총회가 끝난 후에 학부모님들은 각 교실로 입실하고 담임선생님이 학부모님들과 학급 운영 철학과 비전, 학급 운영 방침, 출결 사항 등을 공유합니다. 학부모님들께서는 학교생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고 답을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대학 진학 지도에 대해서도 묻고 요구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학부모 공동 상담 시간입니다.
지금, 학부모 상담의 현주소는?
학기 초에 학부모 개별상담은 쉽지 않습니다. 학부모 상담은 학생 상담 후에 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학기 초에 교사는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해 파악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담임 업무, 교과 업무, 부서 행정업무, 수업 준비, 의무 연수 등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수업시간에 상담할 수 없어 점심시간을 쪼개 상담하기도 합니다. 방과후 학생 개별상담 시간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학부모총회에서 학부모 공동 상담할 때, 학생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에 어렵게 학생 개별상담 일정을 잡고 소화합니다.
학부모 상담은 개별 대면과 비대면, 공통 대면과 비대면으로 다양하게 이뤄집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유선 및 화상상담이 자리 잡았습니다. 맞벌이 가정은 학교 방문상담보다 퇴근 후 전화상담을 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고등학교는 대체로 연 2회, 1학기는 4월 말~5월 말경 ‘학부모 상담주간’을 운영합니다. 상담의 기본 자료가 되는 1학기 1차 정기시험(지필평가) 성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하루에 5~6명 이상 학부모를 연속으로 상담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부담감과 피로감을 호소합니다. 더구나 담임교사의 진학 지도 수준을 측정하는 느낌이 드는 질문을 하는 학부모님도 있습니다. 소통과 상담은 그 교육적 효과가 있어야 선순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담이 끝난 후에 무력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학부모 상담주간은 드물게는 교사 개인의 연락처나 메신저(하이톡 등)를 통해 ‘악성 민원 제기 통로’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상담과정에서 교사의 태도, 교사 언어, 상담 내용이 민원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단 한 명의 학부모 민원이라도 전체 교사에게 주는 부담은 정서적·심리적 억압에 이를 정도로 큽니다.
언제부터인가 상담은 심리적 지지를 넘어 복지적 접근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습니다. 정서적 문제의 배후에는 경제적 빈곤, 가족 해체, 학습 결손 등 복합적 요인이 얽혀 있는데, 이는 대부분 교사나 상담사가 해결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라 상담 과정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전 예약제와 수시 상담 체제로 전환하는 학교도 많습니다. 교사는 ‘학부모 상담 주간제’보다 ‘수시 상담제’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수시 상담제는 학부모님이 담임교사에게 상담을 요청해야 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아서, 고등학교에서는 학부모 상담 자체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시, 학부모 주체화와 교사 보호는?
학교 공동체의 한 축은 학부모님입니다. 학부모님이 학교를 대상화하며 공격하는 경우에 학교는 교육과정을 안정적·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어렵습니다. 민원 대응으로 교육과정에 집중하기 힘듭니다. 교사가 학부모 상담의 교육적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부담스러워하는 까닭입니다. 교사들이 상담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는 개인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상담 구조가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부담’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본질은 ‘관계’입니다. ‘상담’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관계’가 사라지고 ‘교육’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상담’이 사라진다는 것은 ‘학교’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세상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학습과 진학 정보는 학교 밖에서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1학년 마친 후에 내신성적이 낮으면 당당하게 자퇴하고 검정고시 후에 수능 성적으로 정시 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님께 어떤 의미일까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교육은 만남(I-Thou)’이라고 했습니다. 만남은 ‘시간’, ‘머무름’이 필요합니다. 특히 학부모 상담주간은 이 ‘만남’과 ‘머무름’을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회복하는 장치입니다. 학교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상담은 함께 질문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 학생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 가정과 학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붙드는 시간입니다.
학생의 삶은 학교와 가정이라는 두 축 위에 서 있습니다. 학교는 학습 및 진로 진학과 사회적 경험을 담당하고, 가정은 정서적 안정과 가치의 뿌리를 담당합니다. 이 두 축이 다른 방향을 향하면 학생은 혼란을 겪습니다. 학부모 상담은 단순히 입시나 학교생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성장의 방향을 함께 조율하는 교육적 대화입니다. 학부모 상담은 가정과 학교의 유기적 관계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학부모 상담은 단순히 학생을 ‘설명하는 시간’이 아니고 가정과 학교가 서로 ‘학생 성장의 기준과 방향’을 맞추는 시간입니다. 학부모 상담은 사적 이해와 요구를 넘어서서 ‘학교’와 ‘교육’이라는 공적 영역의 범주를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학생의 배움은 경험과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고, 학부모 상담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안전한 상담 시스템 구축을 위한 제언
가정과 학교의 ‘관계’는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구조를 설계해야 합니다. ‘관계’가 사라진 시대일수록 학교는 ‘관계’를 의식적으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학부모와의 공동체적 관계의 신뢰를 복원하여 학생의 안정적 성장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학부모 상담주간’을 교육적으로 운영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부모들이 학교 공동체의 주체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학교에는 학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부모가 학교 공동체의 주체가 될 때 ‘민원’은 자녀의 성장을 함께 고민하는 따뜻한 ‘상담’으로 전환됩니다. 가정과 학교의 소통은 ‘민원’이 아닌 ‘상담 구조’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학부모 상담주간’이 활성화될 때 교사와 학부모는 학생의 성장이라는 하나의 방향에서 교육적으로 만나는 ‘신뢰 관계’를 복원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는 안전한 상담 지원 환경을 구축해야 합니다. 교사들에게 상담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구조를 설계’해야 합니다. 가령 학부모 상담 내용이 민원으로 둔갑하여 교사를 괴롭히는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교사가 안전하게 상담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학부모 상담 운영 원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상담 공간도 정비하고 상담 프로토콜도 마련해야 합니다. 상담은 공식 공간에서 하되 상담 기록을 간단하게 표준화하고 혹여 민원이 발생할 시에 ‘관리자 공동 대응’ 원칙을 명문화해야 합니다.
‘상담 중 발생하는 문제는 교사 개인 책임이 아니라 학교 책임입니다’라는 선언도 필요합니다. 이 선언만으로도 상담 구조는 설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사가 보호받지 못하면 상담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학부모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학부모는 ‘내 아이’를, 교사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어 서로의 간극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런 부분에서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학부모 상담 운영 철학과 방향을 학부모와 공유하고 상호 신뢰를 만드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신뢰 관계가 회복되면 연중 ‘학부모 상담 예약제’를 실시해도 학부모들도 편안하게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고, 교사들은 상담을 ‘추가 업무’라고 여기지 않고, ‘교육적 의미’로 해석할 것입니다.
상담이 사라져가는 학교,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관계를 회복하는 학교 운영이 필요합니다. 교사를 보호하는 학교장의 선언이 필요합니다. 학교장의 선언을 보호하는 교육청과 교육 제도가 필요합니다. ‘보호가 없는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제도가 학교와 교사를 보호할 때, 교사는 학부모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이정표는 학생의 배움과 성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