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일록의 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005.10.25 17:07:00


고전이란 누구나 내용은 알지만 읽어보지는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셰익스피어 작품을 영화화한 <베니스의 상인>은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내용은 대충 안다. 대중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인 샤일록에게‘1파운드의 살점을 가져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명판결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을 위기에 처한 남자를 살려낸 재치있는 판결 정도만으로 알려져 있기에 사건의 배경에 대해 깊이 기억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하다.

때는 1596년, 유럽 해상 무역이 한창이던 시대에 물의 도시 베니스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역으로 인한 금융자본이 몰려든 베니스는 욕망과 사랑, 증오와 분노가 뒤섞여 현장감이 넘치는 도시였다. 봉건시대에서 초기자본주의체제로 진입하던 베니스는 아직 거래원칙을 완전히 체계화하지 못한 관계로 이상과 현실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베사니오(조셉 파인즈)는 아름답고 부유한 상속녀 포시아(린 콜린스)의 사랑을 얻으려고 절친한 친구 안토니오(제레미 아이언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재력가이지만 당장 빌려줄 현금이 없어 난감해하던 유력자 안토니오는 친구 베사니오의 구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을 담보로 하여 돈을 빌리게 한다.

베사니오는 샤일록(알 파치노)에게 돈을 빌리러 간다. 평소에 자신을 증오하고 멸시하여 인간취급도 하지 않던 거상 안토니오가 돈을 빌리러 오자 샤일록은 예리한 분석력으로 앞으로의 사태를 예상하고,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할 경우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위의 살점 1파운드를 떼어 내 줄 것을 계약 조건으로 내 걸었다.

구혼자금을 마련한 베사니오는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사랑하는 여인 포시아의 사랑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파산하게 되어 샤일록에게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리하여 공방전은 일어나고 재판이 벌어진다. 기회를 잡은 샤일록의 집요하게 계약서대로 1파운드의 살점을 요구함으로써 정점에 달해간다.

더러 약간의 갈등은 있지만 큰 맥락으로 보면 기독교도와 이교도와의 싸움에서 기독교의 일방적 승리를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넓게 생각하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인간에게서 미워할 대상을 하나 찾아 마음껏 두들김으로써 대리만족하려는 인간 본성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시대에는 기독교 측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다 보니 여기에도 해설이 필요해졌다. 마이클 레드퍼드 감독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영화는 첫 장면부터 길게 설명을 붙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몰 후에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나갈 때는 반드시 빨간 모자를 써야 한다. 안토니오는 샤일록이 기독교도에게선 금지된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이유로 얼굴에 침을 뱉고 모욕한다.

이를 통해 샤일록은 생각만큼 그렇게 잔인하고 냉혈적인 인간만은 아니며 반유대주의에 의해 핍박받는 또 한사람의 피해자이기에 처절한 복수심도 근거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어 샤일록의 주장을 반쯤 정당화 시켜놓고 본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에서 가장 큰 매력을 끄는 인물은 샤일록이다. 샤일록을 연기한 알 파치노는 이 작품 속에서 어느 인물보다 눈길을 끈다. 이교도에서 오는 차별과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절제된 연기 속에서 강한 분노로 표현한다.

‘소용없는 짓이라도 내 복수심은 채워야지’라며 분노에 찬 눈빛을 번뜩이다가, ‘당신은 나를 개라고 불렀지 않았소. 그러니 내 송곳니를 조심하시오’라는 알파치노의 컬컬하고 강한 목소리는 한순간에 관객을 휘어잡고 자기만의 논리로 상대방을 맞받아치면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베니스에서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에 제법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 시대라도 ‘유대교의 이론’에서 당연함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멸시받고 조롱받고 증오 받았기에 그는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계약서를 흔들며 대항한다.

‘난 계약대로 하겠다’큰소리치며 가죽 끈에 칼을 갈던 모습은 익숙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는 더욱 당당하게 자신의 논리를 편다. 딸의 가출보다도 돈이 없어짐을 더욱 원통하게 생각하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빌려준 돈의 10배의 거액을 준다 해도 거절하며 한 줌의 살점을 요구할 때 모습은 수전노 샤일록에서 혁명가로 변신한다.

그가 아무리 정당한 이론을 펼쳐도 결론은 샤일록의 K.O패로 정해져 있다. 명장면인 재판과정에서 샤일록 쪽으로 잘 진행되다 ‘살은 가져가되 피는 한방울도 흘려서는 안된다’는 말 한마디에 전세는 급변한다. 샤일록은 점점 불리해지고 위기에 몰린다.

그러자 그는 ‘모두들 한통속이군’이라는 말을 던지며 할 수 없이 살점을 도려내는 걸 포기한다.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교묘한 이론으로, 강자의 지원을 받는 변론으로 상대방은 계속 물고 늘어져 상황은 샤일록에게 점점 불리해진다.

안토니오와의 보증계약을 할 당시‘우리 유대인은 인내심이 많다’는 이론을 펼치던 샤일록은 아직 혁명이 끝나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는지 천년을 넘게 쌓아온 유대인의 인내심으로‘그냥 돈은 받을 수 있을까요?’라며 갑자기 머릴 숙여 남루하고 비참해진 늙은이로 자신을 만들어 다시 역사 속으로 숨어버린다.

마이클 레드퍼드 감독은 이 영화를 기존의 선과 악의 두 축에서 악으로만 분류하던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샤일록을 불쌍한 늙은이로 만들면서 현재의 질서와 타협한다.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샤일록을 세월만큼이나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이론과 적당히 접목시키면서 원작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어 버렸다.

그 밖에도 16세기의 베니스와 게토의 모습, 곤돌라, 고딕풍의 연회복, 빨간 모자와 같은 소품과 의상만으로도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기독교도와 유대교의 사이의 깊은 갈등, 안토니오와 베사니오 사이의 이상야릇한 키스, 가슴을 드러낸 채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들의 모습, 금, 은, 납으로 장식된 세 개의 상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케 하여 신랑을 고르는 포시아의 모습을 통하여 영화는 재미를 더해 준다.
이태욱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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