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주례 좀 서주세요"

2005.12.04 22:13:00

토요일 퇴근 무렵이었다. 교무실 연구부장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옆에 있던 최 선생이 전화기를 건네며 농담조로 말을 했다.

"김 선생님, 예쁜 아가씨의 목소리입니다. 전화 받아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여보세요. OOO입니다."
"선생님, 저 몇 회 졸업생 OOO입니다."
"누구라고요?"
"저 기억 안 나세요?"
"글쎄. 누구지?"
"학창시절 선생님을 좋아했던 OO이 인데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래, 너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선생님, 저 결혼해요."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렸구나. 축하한다."
"그런데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 전화를 드렸어요."
"나한테? 그래 무슨 부탁인데?"
"선생님께서 제 결혼식 주례 좀 봐 주세요."
"주례를 서달라고? 농담이겠지?"
"아니에요. 사실이에요. 이렇게 정중히 부탁드려요. 그리고 양가 부모님께도 허락을 택한걸요. 그러니 거절하지 마세요. 조만간 청첩장을 가지고 신랑과 함께 찾아뵐게요."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단다. 선생님이 주례를 선다는 것이…."

그 제자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전화번호도 적어 두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난감하기만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15년이 지난 지금 그 제자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기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할 수없이 보관하고 있던 졸업 앨범에서 그 제자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지난 일들이 아스라이 떠올려졌다.

15년 전 초임교사 때의 일이었다. 총각선생님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내 책상 위에는 꽃과 여학생들이 쓴 편지들이 수북히 쌓여 있어 뭇 선생님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런데 유난히 나를 좋아했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 아이는 졸업을 하면 꼭 나와 결혼을 하겠다며 친구들에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다녔다. 처음에는 사춘기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당시의 행동들이 여고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리라 생각했다.그런데 갈수록 그 아이의 나에 대한 사랑 표현이 지나쳐 어떤 때는 그 학급의 수업이 엉망이 된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나의 사생활이 침해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불러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교실로 돌아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그 아이는 졸업을 하여 연락이 두절되었고 나 또한 그 아이를 찾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듯 잊고 있었던 그 제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그것도 결혼을 한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불혹이 조금 넘은 나에게 주례를 서달라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내가 주례를 선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까. 물론 주례를 보는 대상이 특별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고지식한 생각으로는 어느 정도 인생의 경륜을 갖춘 사람이 보아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제자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으로 제자의 주례 제안은 지금까지 안주하며 생활했던 나의 교직 생활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좀더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달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먼 훗날 또 다른 제자가 나에게 주례 부탁을 하면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이제 제자는 학창 시절 사모했던 선생님이 아닌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꿈 많았던 여고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하며 살아가리라. 결혼식 날 웨딩드레스를 입고 행복해 하는 제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모를 미소가 입가에 지어진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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