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불짜리 열정>을 쓴 이채욱 사장의 글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최고가 되려면 최고에게 배워라. 뜨거웠던 첫 마음을 잊지 말고 열정과 겸손으로 무장하라.'였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직원을 최고의 부모로 만들어 줄 수 없는 리더는 가장 초라한 사람이고, 가장 무례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내가 살아온 삶을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내 반 아이들을 최고의 어린이로 만들어 줄 수 없는 선생님은 가장 초라한 사람이고 가장 무례한 선생님이다.'로 바꿔 놓고 보면 내가 초라한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아픔과 좌절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첫 마음과 열정이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가를 묻는다면, 결손 가정 아이들과 지적 능력 부족으로 손길이 많이 가야 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산만함과 싸움질 앞에서 무너지고 좌절했던 3월은 열정과 겸손, 첫 마음까지 다 잊은 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힘들다는 핑계로 독서마저 소홀히 했던 3월이었습니다. 모든 시작은 나에게 있음을 잊고 아이들 탓을 했던 부끄러움을, 붉은 가슴으로 말없는 열정을 전하는 철쭉앞에서 한없이 낮아진 4월입니다. 꽃들이 전하는 열정과 인내의 시간, 말없는 겸손, 꽃을 피우기로 한 그 약속을 어김없이 보여주는 가르침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다시 일어서기로 다짐하던 날, '최고에게 배우리라.'는 다짐을 생각하며 특별연구교사 수업연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4월 26일 오후 1시 30분 부터 강진중앙초등학교에서 실시된 전라남도교육청 특별연구교사 수업연찬회에는 전라남도교육청의 특별연구교사 열 분의 수업을 보고 배우기 위해 몰려든 선생님들로 강당을 빼곡히 채우고 좌석이 부족하여 입석으로 개회식에 참석하고 강의를 듣는 열정이 철쭉꽃의 붉음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선생님들을 향하여 뭐라고 떠들어도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다 하기 위해 배우고 또 배우는 현장에서 하나라도 더 얻고 육화시키기 위해 새내기 선생님은 물론 연세 지긋한 선배 선생님들까지 마지막까지 수업협의회에 참석하여 기술이 아닌 '양심적인 가르침, 진실한 목소리'를 담은 수업만들기에 동참한 것입니다.
나는 국어과에 관심이 많아서 몽탄초등학교 김형만 선생님이 진행하는 5학년 국어 수업을 보기 위해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수업을 기다렸답니다. 최고에게 배우자는 동기를 안고 찾아간 수업이었던 만큼 보이는 것 모두가 새로움과 감동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후배이기도 한 김형만 선생님은 오늘의 수업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 지 수업 시간 내내 열정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국어교육의 최종 목표인 '창의적인 국어 사용 능력 신장'을 위해 교육연극 기법 중에서 '타블로(움직임 없는 정지 동작)' 기법을 본시와 연관시켜 전개시켜 가면서 끊임없이 아이들을 자극하며 흥미진진하게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정리 단계까지 이끄는 수업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에서 선생님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내 수업을 통해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목적지에 도달하면서도 깨달음과 앎의 기쁨을 함께 느끼는 '예술적 수업'이라는 단어입니다. 전혀 낯선 새 선생님과 40분간 호흡을 나누며 공부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왕성한 표현력, 더 공부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수업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담임 선생님과 공부하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교감으로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밀도 있게 진행된 '교육연극 기법(Tip)을 적용한 이야기 바꾸기의 창의적인 방안 모색'은 수업자가 의도한 대로 '창작의 떨림'과 '재미난 수업'으로 내가 보았던 수업 중에서 가장 예술적인 수업이었다고 감사함을 전합니다.
아이들의 수보다 몇 배나 많은 선생님들이 몇 겹으로 서서 수업을 보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냈던 40분 뒤에는 진지한 수업협의회와 지도조언까지도 배움의 연장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참석하였는지 등록부에 사인하는 데에도 길게 줄을 섰으니, 선생님의 생명이 교실수업 개선에 있다는 전라남도교육청의 목소리가 현장의 선생님들 속에 내면화되었음을 반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정회원수 보다 훨씬많은 선생님이 곳곳에서 찾아오신 열정, 배우고 또 배우려는 겸손, 아이들이 행복한 교실 수업을 위한 현장을 한 번만이라도 보신 분이라면 '스승의 날을 없애자'고 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스승의 날을 없애자고 한 그 분은 아마도 섬기고 싶은 선생님이 한 분도 안 계실만큼 불쌍한 분인 것 같아서 안쓰럽고 안타깝습니다. 전 생애를 통하여 기억하고 싶은 선생님이 없다면 이 보다 더 불행한 일이 없지 않을까요?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 하지 못하면서도 '어버이날만이라도 어버이를 기리고 생각하듯, 스승을 찾아뵙지 못하고 전화 한 번 해드리지 못해도 그날만이라도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그리워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자며 온 세상의 스승과 선생님을 한 순간에 매도하고 몰매를 내던지는 그분에게 연민의 정마저 느낍니다.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한 선생님이나 은사님이 있겠지만 오늘의 내가 있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돌보아 준 모든 사람을 선생님이나 스승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넉넉함과 여유, 한 발 더 나아가 최고의 스승이라는 '자연'마저도 숭배했던 조상들의 정신적인 여유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 지닌 내 모습을 봅니다. 가까이는 내 어버이가 스승이요, 최고의 선생님이며 책 한 권이 스승일 수도 있으며 나를 힘들게 한 사람마저도 반면교사로 삼았던 동양 사상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숙연해집니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눈에 의지해서 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을 그렇게 아프게 매질하는 그대를 향해 묻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가르침을 스스로 배웠습니까?"
"이 땅의 선생님들이 언제 스승의 날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까?"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라고.
5월이 되기도 전에 전국의 선생님들을 죄인으로 몰고 매도하는 것도 모자라서 '쓰레기'라는 악담을 늘어놓는 그의 사고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선생님들 앞에 공개 사죄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선생님들은 더 열심히 배워서 아이들이 행복한 교실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을 올립니다. 세상의 아픈 화살보다도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당신의 거친 언어 속에서도 진주를 찾아 꿰려는 돋보기 하나쯤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열정과 겸손을 무기로 다시 일어서서 세상이 던진 돌마저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주춧돌로 삼을 것입니다. 당신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만큼 나약한 선생님을 둔 당신이 측은합니다.
우리 선생님들은 열정과 겸손을 무기로 다시 일어서서 세상이 던진 돌마저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주춧돌로 삼을 것입니다. 당신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만큼 나약한 선생님을 둔 당신이 측은합니다. 아니, 교단에 서 있는 자로서 한 분의 선생님도, 스승조차 없는 당신에게 대신 미안함을 전합니다.
나는 날마다 20여년 전의 옛 제자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으며 하루를 열기 때문입니다. 부디 당신의 마음이 따스해지기를 빕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거친 언어를 듣고 자랄 당신의 자식들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란 자신의 행동과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무형의 유산을 남기게 되고, 이것들을 온전히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오래 오래 영향을 미치게 되니 학교나 밖에서 만나는 어떤 선생님보다 위대한 스승이 어버이이기 때문입니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교단에 던지는 매를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는 선생님들까지 죽이지 마시길 빕니다. 정 때리시려거든 한 번 쯤 당신의 자녀가 다니는 교실에 가셔서 40분 수업을 한 번만 해보신 다음 돌을 던지셔도 늦지 않습니다. 열정과 겸손으로 다시 설 것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