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냐? 아니면 자율학습이냐?

2006.06.25 08:44:00

6월 23일 금요일. 출근을 하자 학생들과 모든 선생님들의 화제는 24일 새벽 4시에 있을 스위스와 월드컵 경기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가 스위스를 반드시 이겨야 16강에 올라가는 것만큼 스위스와의 대결은 국민 모두에게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일까? 하루가 정말이지 길게만 느껴졌다.

저녁 6시. 9교시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난 뒤 가족과의 저녁약속 때문에 퇴근을 서둘렀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과 외식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친김에 식사를 하고 난 뒤 토요일 새벽에 있을 스위스와의 월드컵 경기를 위한 길거리 응원까지 참여하기로 하였다.

식사를 주문하고 난 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액정모니터 위에 찍힌 번호는 학교였다.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 오늘 야간자율학습 감독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선생님이십니까? 학교로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글쎄, 선생님 반 학생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망을 가다니요?"

"아마도 월드컵 스위스와 시합 때문에…."
"아니 그 시합은 새벽 4시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빨리 학교로 와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가족에게 잠깐 실례를 구하고 학교로 차를 몰았다. 학교로 가는 내내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일이 토요휴업일이고 기말고사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오늘과 같은 아이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실로 갔다. 교실에는 6명의 아이들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하며 모여 있었다. 한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난 뒤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도망간 모든 아이들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30분 내로 학교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내 지시가 떨어지지 남아있던 아이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가지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들고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실을 빠져나와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은 마치 긴박한 상황이 벌어진 듯 교감선생님을 비롯하여 몇 명의 선생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짐작하건대 우리 학급의 학생들만 도망간 것이 아닌 듯 했다. 이야기인 즉 아이들은 9교시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먹지도 않은 채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주동을 한 아이도 없이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교를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잠시 뒤, 우리 반의 한 아이가 상황보고를 하기 위해 교무실로 왔다. 그 아이는 내 얼굴 표정을 보면서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아이들 다 왔습니다."
"정말이지? 열외 일명 없이 다 왔다는 거지. 알았다."

아이들이 다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편으로 20분 만에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멀리 가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담임이 화가 많이 났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전해 들었는지 도망간 아이들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교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교실 문을 열자 아이들 모두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어떤 꾸중이 떨어질지 잔뜩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꾸지람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물며 우리나라를 응원하기 위해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거리로 나간 아이들이 무슨 큰 잘못이 있단 말인가. 따라서 아이들을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자,고개 들고 공부 열심히 해. 그리고 시간이 나면 새벽 4시에 종합경기장으로 와. 알았지?"

그제야 아이들은 마음이 놓였는지 움츠렸던 어깨를 펴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아이들은 우리나라가 16강에 못든 이유를 야간자율학습을 시킨 담임인 내 탓으로 돌릴지 모른다.

비록 우리나라가 스위스 전에 패배하여 16강에 들지는 못했지만 월드컵으로 인해 잠시나마 아이들이 입시의 중압감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던 점은 정말이지 고무적이지 아닐 수가 없다. 나아가 대한민국 전 국민을 하나로 결속시켜 준 좋은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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