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제복을 입은 여성이 가끔 TV에서 봤던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개성 남대문 앞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거리의 상점에 크게 써있는 '리발관' 등의 글씨마저 볼거리였다. 시내 중심가에서 차를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개성이 좁다보니 금방 선죽교에 도착했다.
정몽주의 유적과 유물이 보관돼 있는 숭양서원 바로 아래에 선죽교(북한의 국보유적 159호)가 있다. 돌다리인 선죽교 주변은 나무가 울창하고, 2∼3m의 개천에는 역사의 흐름을 따르는 듯 느리게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암기위주로 공부를 했었다. 그때 학생들은 누구나 '이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이 몸이 죽고 죽어'로 시작되는 정몽주의 '단심가'를 달달달 외웠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기 위함이었는지, 교육상 필요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정몽주와 선죽교, 하여가와 단심가는 시험을 볼 때마다 나오는 단골 문제로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뤘다. 하도 듣다보니 철퇴에 맞은 정몽주가 머리에서 피를 튀기며 죽는 장면이 현장을 직접 본 것처럼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개성하면 선죽교부터 떠올라 꼭 보고 싶었던 곳이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이 역사다. 정몽주가 피를 흘린 자리에 싹을 틔워 '선지교'에서 '선죽교'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는 청죽은 보이지도 않았다. 선죽교의 규모는 길이 7m, 너비 3m정도에 불과해 철퇴를 든 이방원의 부하들이 숨어 있을만한 공간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선죽교는 난간의 앞뒤를 막아놓아 다리 위로 직접 통행하지 못한다. 관광객들은 다리 옆 한쪽에 따로 만들어져있는 돌다리를 통해 관람도 하고 통행도 한다. 다리를 건너가면 한석봉이 썼다는 '善竹橋'가 새겨진 돌비석과 비각이 있다. 옆에 정몽주의 사적(事蹟)을 새긴 비석도 2개 있다.
생각보다 다리는 작지만 역사적 사실 때문에 다리를 배경으로 추억남기기를 하는데 이곳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 우리 일행도 개성시내에 첫발을 내디딘 흥분과 설렘을 달래며 다리 난간 주변에서 열심히 폼을 잡았다. 사실 통일의 물꼬는 이미 터졌는데, 다시는 못 올 땅인 양 호들갑을 떠는 우리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찬양하는 뜻에서 세웠다는 표충비가 바로 옆에 있다. 두개의 거북받침돌 위에 따로 비신이 세워져 있고, 비신에 조선시대 왕들의 필적으로 된 비문이 새겨져있다. 두개의 비는 모양이 비슷하지만 세워진 연대나 크기가 달랐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거북받침돌이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을 안내원은 강조했다.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북측 여자 안내원에게 통일의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을 제안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여자 안내원도 엄숙한 모습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통일을 염원하는 순간이었다.
표충비와 선죽교 사이의 길가에 북측에서 생산한 물건을 파는 상점 몇 개가 늘어 서있다.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노점상에 불과하지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판매원들의 말투에서 애교가 묻어난다. 손님을 다루는 솜씨를 보면서 이곳까지 불어온 자유의 물결을 실감하는데, 정복을 입은 군인 두 명이 멀리서 서성거리며 우리 쪽으로 감시의 눈길을 보낸다. 그제야 북측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차에 올라 고려박물관으로 갔다.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답게 수백 년 수령의 은행나무들이 입구에서 맞이한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은 계단 앞에서 용머리 한 쌍이 지키고 있다. 서쪽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고려박물관은 성균관의 유적인 명륜당과 동재, 서재 등을 전시실로 꾸며 고려청자와 금속활자 등 고려시대의 역사유물 1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 문화유적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시설이나 관리가 허술했다. 그 바람에 가까이서 고려의 유물과 호흡할 수 있었다.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로 직지를 인쇄한 청주에서 온 내가 개성 고려박물관 한 쪽에서 '이마 전(顚)'자가 써있는 금속활자를 만나니 더 반가웠다. 딱 한 개 있다는 고려 금속활자는 가로와 세로가 각 1㎝정도로 작아서 글자가 보이도록 확대경이 놓여져 있다. 직지에 대해 나와 대화를 나눈 안내원은 확대경을 향해 여러 번 셔터를 눌러도 모르는 척 했다.
박물관 한 편에 마련된 야외 세트장에서는 방금 촬영이 끝난 듯 촬영용 소품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여자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남측의 KBS와 공동으로 <사육신>을 촬영중이란다. 개성공단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분단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담 너머로 방송용 차량과 분장을 하고 있는 배우들이 보였다.
박물관 들어오면서 밖에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있는 것을 봤는데, 안에도 상점이 있었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나 수예품, 명승지를 소개하는 책자, 경옥고, 부채, 술 등 상점마다 파는 물건들이 단조로웠다. 그중 7∼10불이면 살 수 있는 술이 인기 품목이었다. 질이 떨어져 살만한 물건이 없었지만, 인지상정이라고 이렇게 라도 북측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연폭포와 송악산, 만월대 등 보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사실 이날 방문에 앞서 한 번 방문이 무산됐었다. 그후 다시 초청장을 받았지만, 개성방문이 계획대로 이뤄질 것인지 반신반의했었기에 아쉬움보다 무사히 다녀간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이번 개성관광은 그토록 보고 싶던 선죽교를 봤으니 '역사로의 여행'이었다. 차창너머로 북측 주민들의 생활모습을 들여다봤으니 '사람냄새를 맡는 여행'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생전에 보고 느낀 게 제일 많은 여행이었다.
차창 밖으로 개성시내를 바라보다 길거리에 나온 주민들이라도 발견하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북측 CIQ에 도착해 출경 수속을 받았다. 입경 수속을 밟을 때 여러 가지를 묻던 북측안내원을 또 만났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걸어온다.
"그래, 뭘 배우고 갑네까? 그렇게 생각합네까?"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보니 남북이 하나라는 것을 더 실감했고, 개성공단의 남북경협이 성공해 남북이 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나를 쳐다보며 안내원이 빙그레 웃는다. 동포애를 느끼게 하는 말투나 웃는 모습이 나를 포근하게 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확인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시 오던 길을 달려 남측으로 향했다. 언제쯤일지 모르지만 이 길의 왕래가 자유스러워 지는 날을 학수고대 기다릴 것이다.
남북을 오가며 절실히 느낀 게 있다. 같은 산하에서 살고 있는데도 북측보다 남측의 사람이나 자연에서 생기가 넘쳤다. 북측은 헐렁해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남측은 꽉 차있어 부족한 게 없는 느낌이었다.
도라산 CIQ에 도착해 입경 수속을 밟았다. 화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갈등과 대립의 고리를 끊으며, 민족통일이 이뤄지길 바라며, 개성공단 방문과 개성시내관광을 마무리했다. 여행의 끝머리에서 산 경험을 시켜준 김기문 로만손 사장의 사업번창과 남북경협의 발전을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