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릎을 꿇었지만...

2006.11.02 10:04:00

막 출근한 이른 시간에 학부모님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어제 저희 자식이 속썩여드린 것 죄송해요”
“아이, 괜찮습니다. 다시 그런 일만 없으면...”
“집에서도 신경 쓸 테니 선생님이 좀 많이 때려주세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아이들이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체벌은 용서하지 않는 세상이다. ‘내버려두면 되지 왜 관여하느냐’고 따지는 학부모라도 만나는 날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편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런데 아침부터 많이 때려달라고 전화를 한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 다 보고 세상 소식 다 들으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챙겨줘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세상이 다 변해도 방관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고집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내 할일을 다해야 편하다.

학기 초부터 도벽이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2학기 들어 아무 일도 없기에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줬는데 이웃 반 선생님이 잠깐 교실을 비운사이 돈을 분실했고, 그게 우리 반 아이들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웃 반 선생님은 자기 잘못이라며 미안해했지만 아이들로서는 큰 돈에 손을 대고도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아이들의 행동이 미워 등감을 몇 대씩 때렸다.

나쁜 습관일수록 빨리 고쳐야 한다. 일이 일어난 과정과 체벌한 내용을 부모님들께 자세히 알렸다. 어떤 일이든 사후처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오후에는 교실에서 어떻게 지도할 것이지를 부모님들과 상의했다. 담임이나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더 신경 써 보살피고 아이들이 쓴 돈을 변상하며 사후처리에 앞장을 서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부모님들에게 죄송하다는 전화를 받았고 아이들은 이웃 반 선생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사실 이만큼만 해도 부모님들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기에 나는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오후에 또 부모님들이 교실로 찾아왔다.

그사이 다른 일이 생겼나 궁금해 했더니 이웃 반 선생님을 직접 찾아뵙고 용서를 구하는 게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해 일부러 시간을 냈단다. 들어보니 교육상 필요한 방법인 것 같아 부모님들과 함께 이웃 반 교실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에 일어날 뜻밖의 일은 생각도 못했다.

교실에 들어서 이웃 반 선생님을 만나자 갑자기 부모님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식을 잘못 둬 죄송하다’고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다.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예기치 않은 일에 이웃 반 선생님이 오히려 더 당황해 했다.

무릎 꿇는 일을 사람들은 수치로 여긴다. 궁지에 몰렸을 때 할 수 없이 선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만 무릎 꿇는다는 것을 모른다. 무릎 꿇은 모습도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 반 부모님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이’에게 쏟는 정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부모님들이 많아지면 아이들은 저절로 즐거워진다. 아이들을 맡기고 뭐 그리 잴 일이 많은가?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득이 될게 무엇인가? 비록 무릎을 꿇었지만 우리 반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을 것이고,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도벽만은 꼭 고쳐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요즘 세상 자기 자식 맞는 것 좋아할 학부모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좀 많이 때려 달라’는 말을 나는 곧이곧대로 믿는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우리 반 부모님들의 자식사랑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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