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설날의 추억

2007.02.13 16:18:00


설날, 어릴 때의 설렘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는 듯하다. 설날을 기해 한 살 더 먹게 되고, 새 옷을 입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된다. 동네를 휩쓸면서 세배를 다니고, 친구들과 정다운 놀이를 한다. 설날은 진정 넉넉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하는 1년 중 단연 최고의 날이었다.

설날 새벽, 일찍 잠에서 깨면 어머니의 손길에 의해 목욕을 한다. 미지근하게 데워 진 통속의 물을 찌클어 가면서 묵은 때를 벗긴다. 살갗에 생채기가 나게 하는 까칠한 목욕수건이 아닌 맨손인데도 잘도 벗겨진다. 몸 여기저기 까맣게 끼었던 때가 벗겨지면 날아갈 것 같이 개운하다.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있는 추위는 몸을 웅크리게 하고 덜덜 떨게 하지만 하나씩 입는 새 옷 때문에 기쁨의 미소가 절로 인다.

양말부터 속옷까지 특유한 새 옷 냄새가 싱그럽다. 소독약 냄새인지 옷감 냄새인지 알 수 없지만 향기로운 꽃냄새보다 더 좋았다. 새 옷이라고 해야 겨우 무명에 검정 물들인 옷이었지만, 오리털은 그만두고 솜털조차 들어있지 않은 홑겹뿐인 옷이었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방한복이 아니라 교복 같은 볼품없는 옷이었지만 설빔이었기에 그냥 좋았다. 어서 나가서 친구들에게 새 옷 자랑을 해야지……

밥상위의 먹거리도 입맛을 돋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떡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떡을 그날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노란 콩고물 묻은 얇은 시루떡은 씹을수록 달고 고소했다. 먹어 본지 무척 오래 된 쇠고깃국, 늘여 먹기 위해 국물이 훨씬 많았지만, 쫄깃한 쇠고기를 씹을 때 느끼는 맛의 쾌감은 설날이었기에 가능했다. 오래오래 씹으면서 그 행복한 맛을 즐겼다.

또래들과 어울려 집집마다 세배를 다닌다. 우루루 몰려 들어가 절 같지도 않은 세배를 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사탕 한두개씩을 쥐어준다. 어느 사이에 호주머니가 불룩해진다. 하루종일 먹어도 남을 것 같은 사탕이 호주머니에 쌓여간다. 달착지근한 사탕,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사탕이 상하좌우 호주머니에 채워진다. 그날 하루는 그야말로 사탕처럼 달콤한 날이었다.

하루 종일 사탕을 먹어대면서 연날리기, 자치기, 못치기, 딱지치기 등 갖가지 놀이를 한다. 하다가 지루해지거나 재미없어지면 새로운 놀이를 하면서……. 설추위가 아직 기승을 부리던 때, 방한복이나 방한구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기에 해질녘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 그땐 토끼털 귀마개가 유일한 모제품 방한구였다. 어설픈 장갑이라도 아무나 끼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해가 서산에 걸친다. 한달음에 달려 집으로 갔다.

참으로 어렵던 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진지 겨우 몇 년 후, 핍박해진 민심과 가난에 찌든 농촌의 현실은 어른들에게는 안타까운 설날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마냥 즐거운 날이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하찮은 설빔, 설음식, 설놀이, 설사탕이었지만 희망찬 앞날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고,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이 만들어져 아름다운 잔상으로 남을 수 있게 하였다. 소박하지만 인정이 넘치고, 작은 것이지만 함께 나누고 흐뭇해하던 그 설날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지수가 높았었다. 발달된 문명과 의식구조의 변화는 설명절마저도 평일과 다름없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배가 세뱃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진 것 같아 아쉽다.
이학구 김제 부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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