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입식 영어공부, 현지에선 안 통해

2007.03.06 13:45:00

3월 5일, 월요일 아침. 우리 아이들이 3개월간의 ESL 과정을 거치고 비로소 이곳(필리핀) 학교에 등교를 하는 날이다. 그래서일까? 부엌에서 아이들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이 예전보다 빨라졌다. 매일 아침마다 아내의 수고를 덜기 위해 이곳 학교에서 하는 급식을 신청하라고 주문하였으나 아내는 믿을 수가 없다며 나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책가방을 챙기며 부산을 떨었다. 특히 중학교 1학년인 막내 녀석은 이곳 현지 학교의 교복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거울 앞에서 멋쩍은 표정을 계속해서 지어 보였다.

녀석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는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나는 아내가 흘리는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사실 지난 몇 개월 짧은 기간 우리 가족에게는 작고 큰 사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사건은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밤마다 보채는 막내 녀석의 가슴앓이였다.

녀석은 영어로 하는 수업에 적응이 안 된다며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말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급기야는 자신의 뜻이 관철될 때까지 단식을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녀석에게 남아 있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는 듯했다.

사실은 그랬다. 영어를 못하면 현지 학교에 입학을 해서도 따라갈 수가 없다는 생각에 녀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식 영어 공부를 시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 질보다 양을 중시한 한국에서의 나의 교육방식이 이곳에서도 통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막내 녀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공부를 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아내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며칠 간 고민을 하다가 녀석의 수준에 맞는 학원을 찾아주기로 하였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과외로 집에서는 개인 튜더(Tutor)와 수업을 시켜보았다. 처음에는 그것마저 거부감을 보였던 녀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어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영어 공부가 재미가 있어서인지 밤샘을 하는 모습도 목격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한 달이 지나면서 녀석은 이제야 귀 문이 열렸다며 영어로 현지인들과 간단한 회화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요즘에는 우리 집 물건 주문은 모두 막내 녀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현지인만 보면 몸을 숨기곤 했던 녀석이 이제는 어디에서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먼저 말을 걸곤 한다.

문제는 '동기유발'이었다. 무조건 해야만 한다는 식의 주입식 교육은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멀리하게 한다는 사실을 녀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현지인에게 영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녀석은 행복한가 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된다'라는 말이 있듯 등교 첫날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지가 문제이다. 무엇보다 영어를 잘하는 이곳 현지 학생들에게 주눅이 들어 자신감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선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극복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곳 필리핀에서도 한국인의 긍지를 잃지 않고 생활할 줄 아는 우리 아이들이 되어주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Nothing venture, nothing have.'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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