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하루, 온 세상 어디에서나 아이들의 하루는 똑 같을까 아니면 다를까.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겠지만 아마 같으리라 본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이 다르겠지만 아이들의 하루는 비슷할 것이다.
아침에 5분, 10분이라도 더 자기 위해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아이, 아침밥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 학교에 가기 위해 책가방을 싸면서 학교 가기 싫다고 투덜대는 아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모습이다.
또 학교에선 수업을 빼먹고 재미난 놀이를 할 궁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부시간은 왜 이리 길고 쉬는 시간은 왜 그리 짧을까 투덜대는 모습도 똑 같다. 예방주사 맞기 싫어 조금이라도 늦게 맞으려 꽁무니를 빼는 모습, 이런 모습을 보면 '아, 나도 옛날에 그랬지'하며 웃음 짓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모습도 있다. 비슷한 놀이지만 놀이 방법, 아니 도구가 다르다. 공부하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교실에 앉아 칠판을 바라보며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길거리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어떤 아이들은 얼굴을 하얀 분칠을 하고 수업을 받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참 진지하다. 그리고 귀엽다.
자, 천 명의 아이들에게 천 가지 하루를 들어보자
이러한 것들을 독특한 글쓰기와 함께 전 세계의 어린들의 모습을 담아 쓴 책이 있다. 천 명의 아이들에게 천 가지 하루를 듣는다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 피쿨리의 <아이들의 하루>다.
<아이들의 하루>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쓴 글이다. 아버지가 마리라는 잠든 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의 하루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일종의 상상 대화다. 그 대화를 통해서 아버지는 아이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본다.
그런데 그 상상 속 이야기들은 허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 것처럼 사실적이고 유쾌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특히 우리가 무심히 바라보는 것들에 대해서도 색다르게 바라보는 모습이 재밌다.
"칠판은 아주 뻣뻣하고 겁먹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실은 몹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엄격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다가오라는 말, 자기 앞으로 모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칠판은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칠판이 수줍을 탄다고? 그래서 아이들을 자기 앞으로 모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껌벅한다니. 매일 칠판을 바라보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칠판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데 말이다.
허나 어린 아이들에게 칠판은 놀이터와 같다. 그 놀이터에 아이들은 마법사가 되어 그림이나 글자, 숫자를 써가며 간질인다. 그러면 칠판은 간지러움을 참다못해 깔깔깔 웃기 시작한다. 그 칠판은 우리나라에도 있고 일본, 미국, 에콰도르, 헝가리, 아프리카에도 있다. 같은 시간, 때론 다른 시간에 아이들의 장난스런 손가락에 칠판은 전 세계에서 웃는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전 세계 아이들의 하루
그럼 방과 후 활동은 어떨까. 우리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공부방에 바쁘지만 이건 어린이들의 일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코끼리를 타고 강으로 가기도 하고, 엄마 심부름을 가기도 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숲의 놀이터에서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뛰어놀기도 한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주어진 시간을 순간의 리듬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렇게 책 속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고 그리고 부모님을 돕는 전 세계의 아이들 모습이 천진하게 그려져 있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전 세계 아이들이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에 대한 궁금증이 풀어진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피지 않으면 글의 초점을 잃기도 한다. 글의 시선이 어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아이들의 세계와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어른의 세계, 두 개의 시선이 교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어려운건 아니다. 굳이 글을 읽지 않아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편안하게 사진속의 아이들을 보며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사진을 통해서도 세계 아이들의 다양한 문화의 차이를 저자는 들려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