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400주년, 우암 송시열 알아보기

2007.06.20 13:19:00

지난 10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구곡을 답사하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이날 회원들은 화양구곡에 있는 화양서원과 만동묘, 청천의 매봉산에 있는 우암의 묘, 묘의 지형과 연관이 있는 청천장을 돌아보며 우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80이 넘는 일생을 살며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삼천 번 이상 나온다는 분이 우암 송시열이다. 또한 자신의 주장이 강했던 인물로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고 문인이었다.

우암은 1607년(선조 40년) 11월 12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의 외가에서 출생했다. 올해는 우암 탄신 40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다른 해보다 여러 가지로 뜻이 깊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인조11년(1633년) 27살이 되던 해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로부터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는 칭찬을 들으며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여러 번 벼슬길에 나섰지만 항상 산천에 뜻이 있어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구곡에 은거하였다.




동양일보에서 발행한 <발로 쓴 충북기행>에 의하면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구곡은 회양목이 많아 황양동(黃陽洞)으로 불리다가 우암이 이곳에서 주자학을 연구한 뒤부터 화양동(華陽洞)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만큼 우암의 영향을 받았던 곳이니 애국사상과 민족자존 정신이 깃든 '우암 송시열 유적(사적 제417호)'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곳에 우암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조선 숙종22년(1696년)에 창건한 화양서원이 있었다. 화양서원은 한때 전국의 사액서원 가운데 가장 이름 있고 위세가 당당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위엄과 권세를 내세워 '서원에 제수비용이 필요하니 **냥을 봉납하라'는 고지서인 화양묵패를 발부하며 민과 군을 착취해 서원이 폐쇄되고 묘정비마저 땅속에 묻혔다.


대원군에 의해 서원이 철폐된 지 150여년 만에 화양서원이 복구를 마치고 제 모습을 되찾았다. 화양서원 뒤에 있는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과 노론의 유림들이 건립한 것으로, 명나라의 마지막 두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는 것이 옳지 않다는 대원군의 판단에 따라 고종2년(1865년)에 철폐되었다가 이번에 화양서원과 함께 복원되었다.

만동묘의 역사와 유래를 기록한 만동묘정비(충북기념물 제25호)가 만동묘 중간지점에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글자를 쪼아 내용을 훼손한 뒤 땅속에 묻은 것을 찾아내 세운 것이다.

우암의 삶은 참 파란만장하다. 숙종 15년(1689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를 가던 송시열이 풍랑을 피하기 위해 잠깐 보길도로 피신을 하는데 이때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를 바위에 새겨놓았다. 바로 보길도의 동쪽 바닷가에 있는 글씐바위인데 탁본하는 사람들이 먹물자국을 많이 남겨 글씨를 알아보기도 어렵다.


팔십삼세옹(八十三歲翁) : 팔십 삼세 늙은 몸이
창파만리중(蒼波萬里中) : 거친 만리 길을 가노라
일언호대죄(一言胡大罪) : 한마디 말이 어찌 그렇게 큰 죄가 되어
삼점적운궁(三點赤云窮) :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궁하구나
북극공담월(北極空膽月) : 북녘하늘 달을 바라보며 끝없이 넓은
남명저신풍(南溟但信風) :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만사재(貂舊萬思在) :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감격읍고애(感激泣孤哀) :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그 당시는 인간의 수명이 짧아 60세만 되어도 극 노인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유배길에 올랐을 때가 2월이었으니 바다풍경도 칙칙했을 테고, 누릴 것 다 누렸지만 80세가 넘어 또 귀향을 가는데 어찌 신세를 한탄하지 않겠는가? 글씐바위 앞에 가면 바위에 글씨를 쓰고 있는 우암의 모습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우암은 일세를 풍미하던 큰 별이었지만 그 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전북의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그래서 정읍의 사약을 받은 장소에 우암의 수명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청천면 소재지 길가의 파출소 앞에 '우암 송시열의 묘'를 알리는 팻말이 있다. 팻말을 보고 앞쪽으로 90여m만 가면 비문이 정조의 어필로 알려진 송우암 신도비(충북기념물 제10호)가 나타난다. 바로 앞에 숭모제(崇慕齊)라고 써있는 고가가 반파된 채 서 있어 흉물스럽다.

신도비 옆에 수령이 370년이나 된 높이 16m의 보호수(괴산 55호) 은행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이 나무 주변에 백로가 많이 서식해 조수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 옆에 있는 신축건물 응봉병사(鷹峯丙舍)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우암의 묘소는 원래 수원의 무봉산에 있었는데 숙종 23년(1697년)에 이곳 매봉산 중턱으로 이장했다. 신도비를 왼쪽으로 돌아서면 우암의 묘소까지 계단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근래에 정비 작업을 한 묘소에는 2기의 묘비와 문인석, 망부석 등이 잘 갖춰져 있다.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 매봉산의 봉우리가 장군봉이라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장군 밑에 장졸이 많아야 하기에 장군봉이 마주보이는 평지에 청천장을 세웠다고 한다. 또 청천의 지형이 배의 형상을 닮아 매봉산이 마주보이는 곳에 장터를 열어 사람들이 모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대학자였던 우암이 왜 장군지형에 묻혔을까를 궁금해 한다. '우암은 학자지만 체구가 대장군처럼 컸고, 풍모와 위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는 안종덕 회원님의 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풍수지리대로 청천시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5일 장이 서는 날인데 일요일에 장이 서면 사람이 없단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청천의 장날 모습을 구경했다. 아케이드 지붕으로 단장해 옛 시골장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우암의 묘소가 있는 청천 소재지는 화양구곡이나 선유구곡을 오가는 길목이다. 꼬리를 무는 차량행렬들이 우암의 묘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암 송시열의 묘]
청주 - 미원 - 청천 파출소 앞 - 송우암신도비와 은행나무 - 우암 송시열의 묘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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