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 간간이 흘러간다. 청명한 대기와 따사로운 햇살 받으면서 오곡이 익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황금 빛깔 진해지는 들녘에는 풍요가 넘친다. 통통 여무는 벼이삭의 낱알들이 싱그럽다. 큰 키를 과시하려는 듯 위로만 커지던 해바라기도 통통한 얼굴 무거워 고개 숙인다. 날씬한 몸매 자랑하던 수수도 여문 이삭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갓난 애기의 주먹보다 작은 산감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간다. 아직은 설익은 은행열매가 바람에 못 이겨 ‘후두둑’ 떨어진다. 고약한 냄새 덕분에 주워가는 사람조차 없기에 마음 놓고 통통하게 익어간다. 파란 고슴도치 밤송이 속에서도 알밤이 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곧 갈라지며 진한 갈색 알밤이 대지를 향해 뛰쳐나올 것이다.
봄의 파종과 가꿈, 여름의 뜨거움과 자람, 중추의 싱그러운 결실, 이제 곧 민족의 명철 추석이 된다. 조상께 차례를 시작으로 조상들의 산소를 찾는다. 조상들의 자랑거리를 듣는다. 조상들의 애환도 듣는다. 수십 년 전 아니 수백 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그 많은 조상들 중에 내가 자긍심을 가질 만큼 훌륭한 분도 있지만 이름 없이 살았던 조상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미 자연으로 승화된 그 분들인데 부질없는 구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친조부모 외조부모 네 모두 본 적이 없었다. 모두 단명이었는지 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모두 돌아가셨다. 어설프게라도 찍힌 흑백사진 한 장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느낌조차 가질 수 없었다.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부모님의 말씀만으로는 나의 머릿속에 그분들의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그저 내게는 없는 그 분들이었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상들의 산소가 있다. 아버지형제들, 사촌형제들과 함께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논길 밭길의 풀밭을 걸어 산소를 찾곤 했다. 이슬에 젖어버린 새 양말 새 옷 바짓가랑이가 아깝기도 했다. 호주머니에는 차례상에서 챙겨 넣은 곶감, 알밤, 우린 감 등이 있다. 한 개씩 꺼내 먹을 때의 달콤함을 잊을 수 없다. 내 고향은 평야지여서 과일나무가 드물었고 우리 집에는 아예 한 그루도 없었다.
난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쌀이 있다. 아직 덜 익은 벼를 베어 훑어서 솥에 쪄서 말려 절구에 찧은 쌀이다. 노랗고 말랑말랑하다. 한주먹 입에 넣고 깨물면 무척이나 고소하고 달콤하다. ‘올기쌀’이라고 했다. 그 쌀로 지은 밥은 노랗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했다. 별로 쌀밥을 못 먹던 때라서 그랬겠지만 정말 맛있었다. 쌀은 없는데 아직 벼는 익지 않았고 명절에 쌀밥은 먹어야 되겠기에 궁여지책으로 ‘올기쌀’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추석날이 좋았던 이유는 또 있다. 새 옷을 입는 날이다. 이날부터 겨울옷을 입게 된다. 월동준비가 제대로 되는 날이다. 새 옷 냄새가 참 좋았다. 속옷부터 겉옷까지 양말까지도 새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행여 흙이 묻을까 물에 젖을까 염려도 컸다. 그런 염려가 며칠 가지 못한다. 또다시 더러워지고 닳아지고 찢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내게 거의 반세기가 흘러버린 요즘, 같은 한가위인데도 맞이하고 보내는 모습이 어릴 적과 너무 다르다. 변해온 과정을 경험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숨조차 쉬지 못하고 기절초풍할 것이다. 문명의 발전이 어디까지일지 모르겠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문명은 조금씩 연속적으로 발전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면 분명 과거나 미래의 이질적인 문명에 혼비백산 할 것이다.
이학구 김제 부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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