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서랍과 연필꽂이에 볼펜이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나는 저 볼펜들을 볼 때 흐뭇하거나 기분이 유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뭔가 안타깝고 아까운 생각이 먼저 든다. 저 볼펜들을 다 써서 소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없이 좋은 알뜰한 경제생활이 될 것이다.그러나 그 동안 나는 볼펜 한 자루가 어떻게 우리에게 와서, 어떻게 사용되다가 어떤 과정을 거쳐 수명을 다 하게 되는지를 직접 체험 하기도 하고 주위에서 많이 보기도 했다.
내 어렸을 때 얘기를 지금 하면 사람들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꺼낸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물자가 흔해지고 생활 여건이 나아졌다고 해서 물건을 함부로 낭비하고 소홀히 대한다는 것은 전혀 칭송받을 미덕도 아니고 지혜로운 경제생활도 아니다. 내 어렸을 때는 볼펜이 없었다. 초등학교 내내 연필만 사용했다. 품질이 좋지 않아 연필칼로 깎으려면 나무결이 쪽 쪼개져 볼품없이 연필심이 드러나기도 하고 너무 흐려서 침을 발라 꾹꾹 눌러 써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수학은 여전히 연필을 사용했지만 기타과목 필기는 당연히 펜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았던 터였다. 그래 잉크병을 좁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매끄럽지도 않은 까칠까칠한 펜으로 꼬불꼬불한 영어와 복잡한 한자를 써내려갔던 그 불편을 요즘 학생들은 알 까닭이 없다. 그러다가 잉크병이 넘어져 가방이며 책, 공책에 커다란 잉크 얼룩을 만들어가지고 다니던 기억이 바로 엊그제의 일만 같다. 가끔 교복, 특히 하복에도 잉크를 쏟거나 묻혀서 그 얼룩을 빼느라고 애를 먹곤 했다.
그러다가 시판되는 국산 볼펜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생이 된 이후였다. 책상 위에 잉크병을 올려놓고 펜으로 잉크를 찍어서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없어진 것이다. 처음 볼펜을 사용할 때는 볼펜을 매우 소중하게 다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써야 새 것을 구입하는 것은 물론 볼펜 심만 따로 사서 갈아끼우는 식으로 절약을 했다. 그렇게 학창을 보냈으니 요 근래의 풍경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요새는 다양한 용도의 볼펜이 생산 보급되고 있다. 국산뿐 아니라 외국 제품도 수두룩하다. 모양도 기능도 각양각색이니 우리는 얼마든지 취향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더군나다 요새는 각종 기념품으로 혹은 선물용으로 많이 유통되다 보 니 직접 사서 쓰지 않아도 얼마든지 볼펜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 서랍이나 연필꽂이에 넘쳐나 는 것이 볼펜인 것이다.
내 책상 위에도 빨강, 파랑, 검정색 볼펜을 비롯헤 삼색, 사색 볼펜이 수두룩하다. 언제 내가 볼펜을 구입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이 볼펜들 중에 선물로 받은 것도 여러 개다. 사은품으로 증정받은 것도 있고 행사에 참여했다가 기념품으로, 혹은 개업식에 갔다가 기념품으로 받은 것도 있다. 쓰레기통에서 건져 낸 것도 더러 있다.
혹자는 볼펜이 많으면 좋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천만에 말씀이다. 필요 이상으로 어떤 물건이 많으면 그것 은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다. 아무리 볼펜이 많아도 우리가 쓰는 것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 볼펜이 훌륭한 장식품이 되는 것도 아니니 쓰지도 않는 많은 볼펜을 바라보면 오히려 마음만 불편해지기 일쑤다.
어떤 때는 저 볼펜만 가지고도 평생 쓰고도 남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평생 쓰고도 남을 볼펜이 지금 내 서랍과 연필꽂이에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풍족이 아니라 또 하나의 걱정거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심정도 혹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저 볼펜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관상용으로 책상에 놓고 오래 감상하기도 적절치 않고 가장 요긴하게 쓸 사람이 있으면 주고도 싶지만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 볼펜이니, 산간벽지의 어린이나 저 후진국 어린이라면 모를까, 도회지 아이들 누가 그리 달갑게 여길 것인가.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저 볼펜을 온전하게 다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요원한 일이기만 한 것이다. 대부분의 편지가 이메일로 전달되고 학생들도 이제 거의 공책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책 여백에다 요점을 정리하는 것으로 공부 방식이 달라졌다.
저 볼펜들이 이제 천덕꾸러기나 다름 없다. 그런데도 날마다 선물용, 기념품용, 사은품용 볼펜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직도 볼펜을 선물용으로는 가장 적합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선물용 볼펜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한번 재고해봐야 할 문제일 것 같다.
저 시골 벽지나 가난한 나라에선 볼펜 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생각할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쓰지않는 볼 펜들을 모아 소중하게 쓰일 곳으로 보내는 운동이라도 벌였으면 좋겠다. 물론 볼펜 만이 아니다. 우리의 의복도, 기타 가전제품까지도 전혀 사용하기에 불편없는데 단지 신제품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페기처분 되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물자 낭비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 이전에 우리의 정신의 문제이다. 불필요한 물건이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은 공연히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것은 정돈되지 않은 생활, 혹은 잡다한 잡념으로 가득한 마음처럼 나의 생활 주변을 어수선하게 늘어놓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한 자루의 볼펜을 움켜쥐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어린이의 모습, 그것이 바로 행복의 모습이고 충만과 감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