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척효자비와 미테재를 찾아서

2007.10.09 07:40:00

7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양반이 통치하던 시대에 백정의 신분으로 효자비를 받은 ‘양수척효자비’와 청주의 옛길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미테재’를 다녀왔다.

송태호 대장에 의하면 청주와 보은을 오가려면 미테재와 살티를 넘어야 했다. 그중 미테재 길은 청주읍성 남문으로 나와 육거리, 일신여고, 금천동사무소, 금천오거리(마을금고),영운천, 낙가천, 소미재로 이어졌는데 개발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지점이 많지 않다.

이번 답사는 청주삼백리 청주사랑 시민강좌가 열리고 있는 금천동 주민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금천동은 사금을 캐냈다하여 쇠내개울, 쇠내로 불리다가 현재의 금천(金川)이 되었다. 흥덕구청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는 금천동사무소를 지나며 청주 옛길을 달렸다.

영운천을 건너면 바로 용암동이다. 용바위가 있어서 용바위골, 용박골로 불리던 용암동은 15년 전만해도 산비탈에 다랭이논과 따비밭만 있던 곳이었는데 5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신시가지가 들어섰다. 아파트 단지 옆으로 유선형의 냇가가 있어 도심 속에서 자연을 느끼게 한다. 


동부우회도로의 보살사 입구에서 하차 했다. 이곳이 도보로 답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시민강좌를 주선하고 있는 금천동사무소 사무장님의 인사가 있었다. 청주삼백리에서 발행한 청주 주변의 지도를 펴놓고 오늘 답사할 코스를 살펴봤다.

골프연습장을 끼고 돌며 56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보살사로 이어지는 내가 낙가천이다. 흘러가는 물의 양이 적었지만 10여 마리의 집오리들이 낙가천에서 햇살이 따가운 가을날씨를 즐기고 있다.


미테재 가는 길은 보살사 가는 길에서 오른쪽 산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우진교통을 막 지나며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언덕길이 나타나고 주변에 전원주택들이 많다. 언덕길 끝에 있는 낮은 고개가 소미재다. 개발로 낮아진 소미재를 사이에 두고 화려한 용암동과 수수한 월오동이 공존하고 있다. 청주 인근 최대의 포도 산지인 보살사 방향의 포도밭에도 하나, 둘 전원주택들이 들어서고 있다.

소미재는 장을 보러가는 고개라 장고개로 불리었다. 나무꾼들이 막걸리 한 사발 마시던 소미재 아래 주막집에는 늘 나뭇짐들이 줄을 서있었다는데 그게 바로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의 애환이었다. 가장 최근에 붙여진 이름은 수도고개다. 청주의 제일봉 선도산 아랫마을인 월오동에 저수지를 막아 그 물을 시내의 일부지역에 공급하였는데 그때 수돗물이 이 고개를 넘어가는 바람에 수도고개라고 했다.

물론 나뭇짐이나 수돗물이 고개를 넘던 것과 달리 능선을 따라 지나쳐 가지만 소미재는 용암동에서 보살사, 김수녕양궁장, 것대산활공장, 상당산성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소미재 아래로 내려서면 월운천을 만난다. 월운천을 끼고 목련공원 방향으로 마을 안길을 걷다보면 청주 제일봉 선도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지점에 ‘비선거리’라는 글자가 선명한 바위덩어리가 길옆에 놓여있다. 비가 서 있는 거리를 뜻하는데 양수척의 효자비가 서 있는 거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수척효자비’는 다리실 앞에 있는 비석으로 앞면에 孝子楊水尺之碑(효자양수척지비)라는 글자, 뒷면에 건립시기 등을 새겼다. 오랜 세월 길가에 방치된 탓에 판독하기가 쉽지 않고, 양수척에 관한 이야기도 정설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많다.

조선 세조 때 이 마을에 사는 부부가 늦둥이를 낳았다. 얼마나 귀엽던지 서로 상대편을 때리라고 시키고는 아들이 시키는 대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부모를 때리는 게 버릇이 된 아이는 커서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도 어머니를 때리는 게 일이었다. 걸핏하면 자식에게 매를 맞으며 어머니는 지옥 같은 생활을 했다.

그때 학식이 높고 만고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경연(慶延)이 이웃인 남일면의 모산에 살고 있었다. 경연은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얼음 속에서 잉어를 잡아 병을 고친 효자이자 청백리였다. 그가 살았던 곳은 훗날 효촌이라 불렸고, 효촌리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효자비와 정문(旌門)이 있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다.

어느 날 경연의 집으로 심부름을 갔던 양수척이 하룻밤을 묵으며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효자 경연의 행동을 지켜보게 되었다. 경연이 어른보다 먼저 이불 속에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효자라면서 다른 게 뭐가 있느냐고 욕을 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보니 경연이 자기가 누워있던 이불속으로 어머니를 모셔 주무시게 한다.

어머니가 편히 주무시게 하려고 온기로 이불속을 따뜻하게 하는 경연의 효행을 보고 양수척은 그동안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친다. 새로운 사람이 된 양수척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효도를 다하는 효자가 된다.

‘다북쑥도 삼밭에 나면 곧아진다’는 속담이 있다. 줄기가 곧지 못한 다북쑥도 줄기가 곧은 삼밭에서 자라면 같이 곧아진단다. 경연의 효행을 보고 뒤늦게 효자가 된 양수척이 이 속담에 잘 어울린다. 즉 ‘보고 배우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맏이였던 양수척과 두 아우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저질렀고 늙은 어머니에게도 공손하지 못했다. 매일 자식들을 걱정하던 노모가 병으로 눕자 삼형제는 그냥 놔둘 수 없다며 고려장을 하기로 결정한다. 이 소문을 인근의 효촌리에 살던 효자 경연이 듣게 되었고, 경연의 꾸짖음에 감화된 삼형제가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야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와 더 재미있고, 한편으로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다. 양수척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진도나 무창포에서 열리는 신비의 바닷길을 능가한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양수척은 월운천 건너편 청주읍성 쪽에 있던 약방으로 급히 뛰어간다. 약을 지어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물이 넘쳐 월운천을 건널 수 없었다. 약봉지를 손에든 양수척이 건너편의 집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물길이 갈라져 어머니를 살릴 수 있었다. 하늘을 감동시킬 만큼 양수척의 효행이 지극정성이었다는데 그때 물이 1척만큼 벌어졌대서 수척(水尺)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도 한다.

지금은 민주화까지 이뤄진 세상이다. 백정신분으로서는 전국에서 최초로 받은 효자비가 양수척효자비였다는데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아름답게 가꾸고 창조해야 하는 문화다. 좁은 도로변에서 방치되고 있는 양수척효자비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청주시청 홈페이지에도 비지정유형문화재로만 분류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양수척효자비를 연구조사하고 있는 청주삼백리의 송태호 대장은 하루빨리 좋은 장소로 이전해 제대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지역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효자비를 뒤로하고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목련공원 가는 길을 만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풍차송어장 간판이 보인다. 안내된 표시대로 송어장까지 가면 넓은 잔디밭,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욤나무와 장독, 풍차와 물레방아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연들이 새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타조를 비롯한 각종 조류도 관찰할 수 있어 쉼터로도 제격이다.


송어장 건물 뒤로 두 개의 길이 보이는데 미테재로 가려면 왼쪽 입구의 언덕길로 올라야 한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적하고 호젓해 옛 정취가 느껴지는 길이지만 입구부터 길이 넓어 이곳이 옛날에는 주요 통행로였음을 증명한다.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이 고갯마루를 넘었을 옛 사람들의 모습도 떠올려본다.

사람의 통행이 적어지며 환경이 변했을까? 청주삼백리에서 발견해 관리하고 있는 옹달샘 주변은 숲이 습지에 가까워 길에 물이 많고 질다. 물이 솟아오를 때 가끔 함께 나오는 사금들이 미세하지만 옹달샘의 바닥에서 반짝거려 이 주변이 일정시대에 금맥을 찾던 지역임을 실감하게 한다.

옹달샘을 지나 한참을 걷다보면 미테재 정상을 만난다. 청주시 월오동과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를 잇는 미테재는 청주와 보은을 오가던 사람들이 넘나들던 옛길이다.


청주삼백리 회원들은 답사만 하는 게 아니다. 미테재 정상을 알리는 표식기를 달고 길게 줄을 서 서낭당 복원공사를 했다. 미리 준비해간 낫으로 서낭당 주변과 길가에 웃자란 풀을 제거하고 송태호 대장으로부터 미테재와 서낭당에 얽힌 이야기도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시간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것저것 내놓으면 금방 풍성한 식탁이 야외에 차려진다. 이때쯤이면 정상주로 넣어온 소주도 등장한다. 자연의 감미로움에 흠뻑 취하게 하면서 술에는 취하지 않도록 하는 게 산이라 몇 잔 마셔도 괜찮다.


미테재 정상에서 황청리로 내려가는 산길은 좁아서 더 살갑게 다가온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끼가 낀 고목들도 답사 길을 운치 있게 만든다. 산을 사랑한다고 숨을 헐떡이며 높은 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휴지나 음식물 찌꺼기를 마구 버리고 간다. 산길이지만 여느 날과 같이 회원의 손에 쓰레기봉투가 들려있다.

양 옆으로 밤나무와 으름나무가 꽉 들어차있다. 시기적으로 늦어 땅에 떨어진 밤은 모두 썩었고 나무에 매달린 으름은 알맹이가 모두 빠졌다. 그래도 길가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니 남아있는 게 있었다. 목이 아릴만큼 으름을 여러 개 따먹었다.


산을 내려오면 좌대가 여러 개 놓여있는 저수지를 만난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고 있는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인다. 길가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와 코스모스, 길에 널려있는 빨간 고추와 들판에서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 때문에 마을의 풍경이 한가롭다.

마을 회관 옆에 범죄 없는 마을 표석이 서있다. 늘 산과 들판을 보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순수할 수밖에 없다. 황청리 마을사람들의 소박하고 순박한 시골 인심을 알고 나니 마을이 더 풍요로워 보인다.

오랜만에 나선 산행이었지만 몸이 가벼웠고, 답사 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 마음의 양식을 풍성하게 살찌운 하루였다.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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