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직에 몸을 담고 평생직업으로 살아온 교직을 선택하게 된 것은 학교선생님이 아닌 분이시다.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신 아버지께서 자식의 진로를 정해 주셨다는 생각을 하니 진로교육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생각을 해본다.
남보다 늦게서 대통령 옥새가 찍힌 교장발령장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며 “아버지께서 선생이 되라고 하신 덕분에 이렇게 교장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밝게 웃으시던 모습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자식이 첫발령을 받은 학교구경도 못하신채 지난 9월 말일 병상에서 눈을 감으시며 세상을 하직하여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
나는 6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만해도 실업계고등학교를 나오면 취업이 잘되어 중소도시에서는 인문계고등학교 보다 인기가 더 좋았다. 공업입국으로 산업사회가 시작되던때라서 농과 공과 상과로 구성된 실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하였다. 전공과 실습시간이 많아 국ㆍ영ㆍ수를 배우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대학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3학년 2학기에는 시멘트 공장으로 현장실습도 다녀왔고 한국전력에서 한명을 뽑는 시험에 응시했으나 선발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무렵에 시골집에 들어갔을때 였다. 6.25전쟁에 참전하신 후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시던 아벼지께서 면서기, 순경, 교사 이렇게 세가지 직업을 이야기 하시면서 그 중에서 교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시며 교사가 되는 시험을 보라고 하셨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교육대학을 가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청주교육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방황을 하고 있는 나를 보시고 하루는 원서를 냈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격하지 그렇게 놀아서 어떻게 하느냐면서 심하게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엄한 채찍에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대학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터라 합격의 기쁨을 안고 3년간 배운 전공과는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하게 되었다. 60 여호가 사는 시골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2년간 교육대학을 다니며 공부한후 초등학교 2급정교사로 모교에 첫발령을 받아 여러학교에 근무하면서 한때는 직업을 바꿔보려고도 했고 중등학교로 가기위해 야간대학을 다녀 중등교사 자격도 받았으나 중등으로 전직을 못하고 늦게서 승진의 꿈을 품고 연구하고 벽지점수따서 남들보다 늦게 교감이 되었고 교장에 이르게 되니 평생직업을 갖도록 해주신 아버지의 진로지도가 나의 운명을 결정해 주셨다는 생각을 하니 아버지의 생전의 모습이 더욱 그리워진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까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작은 초등학교 아이들이지만 기초 기본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아동교육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 나의 진로를 정해주신 아버님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은 아버지 묘소를 찾아뵈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