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의 65%가 산림이니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다. 높은 곳에 오르면 첩첩이 산이고 도회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산을 만난다.
그 많은 산들이 사계절 옷을 갈아입으며 국토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숲, 계곡, 휴양림, 호수 등 산은 우리네 생활과 밀접하다. 작거나 크거나, 낮거나 높거나 걸맞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큰 산들은 이름이 서너 개나 되다보니 동명이산(同名異山)이나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 그래도 생김새나 전해내려 오는 설화에 의미를 부여하면 저마다 특색이 있고 그럴듯한 사연이 있어 애착이 간다.
주변의 산에서 흔히 들어볼 수 없는 이름도 있다. 부모산이 그중 하나다. 부모산(父母山)은 다정함과 친근함이 묻어나는 부모(父母)와 엄숙함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산(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부모와 자식 간의 정과 효를 떠올리게 하는 산이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과 지동동의 경계에 부모산이 있다. 강서초등학교 뒤편의 부모산은 새털처럼 포근한 둥지를 만들어 놓고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등산로를 따라 부모산성을 한바퀴 돌아보면 잇속을 따지지 않는 부모의 내리사랑도 배운다.
경부고속도로의 청주나들목과 중부고속도로의 서청주나들목 사이에 있는 부모산은 해발이 232m에 불과하지만 청주의 서쪽에서 가장 높고 청주시내와 미호천, 미호평야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이름만큼이나 크게 보이는 큰 산이다.
동쪽으로는 청주시내 건너편의 우암산(338m)과 상당산성, 북동쪽으로는 미호천 옆에 있는 정북동토성과 오창의 목령산성, 북서쪽으로는 옥산의 동림산, 서쪽으로는 강외의 병마산성, 서남쪽으로는 은적산의 저산성과 복두산의 복두산성, 남쪽으로는 남이의 팔봉산과 봉무산, 남동쪽으로는 문의의 작두산성과 연결된다.
청주삼백리의 우리고장 바로알기 시민강좌에 참여한 사창동 주민들과 강서 1동 주민센터에서 부모산을 오르는 답사 산행을 했다. 강서초등학교 앞 담장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걸으면 중부고속도가 가로지른다. 굴다리를 빠져나와 우측 주봉마을로 200여m 가면 부모산 1.7㎞를 알리는 갈림길이다.
등산로 양옆에 잘 가꾼 묘지가 많은데 비교적 길도 평탄하다. 새로 만들어지는 게 역사라고 오가는 사람들이 요즘에 생긴 돌무더기에 돌을 쌓으면서 소원을 빈다. 산소 끝자락에 서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연화사 못미처 있는 옛길을 만나자 아픈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이곳으로 소풍을 왔었다. 왕복 30여리가 족히 넘는 길이었다. 이 옛길을 오르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오랫동안 232m밖에 되지 않는 부모산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 줄 알고 자랐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변했지만 부모산은 언제나 인자한 모습으로 고향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연화사는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든 울창한 숲과 녹음 속에서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연화사의 대웅전은 건물이 퇴락하여 2004년에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1973년에 만들어진 범종과 반자, 1983년에 만들어진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비롯해 옛 법당에 있던 불상과 불화들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용이 새겨진 받침돌 위에서 청주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석조미륵불, 오석에 음각으로 글을 새긴 사적비, 사천왕과 여래불을 조각하고 처마에 풍경을 달아 백탑의 모습을 부각시킨 칠층석탑, 1965년에 신축한 요사채, 부모산의 전설을 간직한 모유정의 수맥이 용출하고 있는 용왕각이 있다.
용왕각의 물은 물맛도 좋고 청주시 흥덕구에서 먹는 물 공동시설로 지정해 수질검사를 하고 있어 마음 놓고 마셔도 된다. 여러 개의 물통으로 물 앞을 가로막고 쌀쌀하게 대하던 보살님이 물맛을 떨어뜨리는 게 흠이다.
연화사에서 50여m만 오르면 서청주 주변과 청주시내, 우암산과 상당산성, 미호천과 미호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농부지의 높이 솟은 아파트 현장, 2012년이면 하이닉스 공장부지로 사라질 고향의 주변 마을이 눈앞이다.
정상 주변에는 드문드문 체육 시설물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가족들과 함께 산에 올라 휴식을 취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오늘따라 부럽다. 사창동 주민들은 이곳에서 쓰레기 줍기와 자연보호 캠페인을 벌이며 모범을 보였다.
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발굴과 보수가 이뤄지고 있는 북문 및 수구부 일원이다. 언덕에 오르면 미호평야와 오창과학단지, 청주역과 옥산의 동림산, 오송생명과학단지 현장과 강내가 눈앞에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던 돌들이 역사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 발굴이 뒤늦게 이뤄졌음을 알게 한다.
2002년 충북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된 길이 1135m의 부모산성은 석축 산성으로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졌으나 기저부는 온전히 남아 있다. 중부 이남지역에서 처음 발견된 보축 성벽으로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사적이 될 확률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에 '청주 서쪽 15리에 둘레 2427척의 석축산성이 있고 가물 때에 성안에 있는 큰 연못에 기우제를 지내며 지금은 폐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동여지도에 청주의 서쪽 산성으로 크게 점 찍혀 있다는 것으로 봐 큰 연못이 있었을 만큼 청주지역에서 중요한 산성이다.
갈림길 위로 송신탑이 서있는 정상이 보이는데 그곳에 있는 모유정은 출입할 수 없다. 갈림길의 쉼터에서 사창동 주민센터에서 제공한 두부를 안주로 동동주도 마셨다. 우리 가락 좋을시고 부모산에 울려 퍼진 판소리는 소화제였다.
사창동 주민들과 부모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양산, 악양산, 아미산'으로 불리다가 부모산이 된데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부모산은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 적을 피해 숨어있기에 좋은 장소였다. 고려 말기 몽고군이 침입하자 고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와 적의 공격과 노략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립된 생활을 하는 바람에 성안의 식량과 물이 떨어져 사람과 말이 목말라 죽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성안에서 샘물이 솟아나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그 은혜가 부모와 같다 해서 부모산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빼앗은 화천당 박춘무(1544~1611)에 관한 얘기다. 박춘무와 의병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산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을 포위해 식량과 물의 보급을 차단했다. 보름을 넘기자 아사자가 속출했고 박춘무도 산기슭 큰 소나무 밑에 쓰러졌다.
이때 지팡이를 짚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의식이 희미한 박춘무를 깨운 후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군사들에게 소나무를 뽑게 하자 식수는 물론 말을 목욕시킬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군사들은 용기백배 사기가 올랐고 이 사실을 안 왜병들은 북쪽으로 도망쳤다.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것이 자식을 돌보고 음식을 주는 어버이의 은혜와 같아 부모산으로 부르며 제단을 쌓아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박춘무가 백발노인의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은 어머니의 젖과 같다하여 모유정(母乳井)이라고 했다.
한편 풀무처럼 생긴 산, 풀무가 있는 산으로 해석해 풀무가 불무와 불모의 변형과정을 거쳐 부모산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거나 본래 이름인 아양산(我養山)도 아비 야(爺)와 어미 양(孃)을 쓴 부모산의 이음동의어인 야양산(爺孃山)이라는 견해도 있다.
부모산의 영험 때문일까? 이곳 사람들은 6.25 등 전쟁시의 인평피해, 폭우나 우박 등의 자연재해, 산짐승의 농작물 피해가 다른 곳보다 적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가로수길을 걷기 위해 진약고개 방향으로 하산했다. 산길이지만 평탄하고 남이의 팔봉산과 신흥도시인 가경동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을 만난다. 가로수길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도회지의 가을 풍경을 아름답게 한다.
강서부대 앞에서부터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알려진 가로수길을 걸었다. 플라타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터널을 이루고 있다. 떨어진 낙엽들이 차량이 오갈 때마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모습도 이채롭다.
청주의 가로수길은 영화나 TV 드라마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 가로수길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사계절 모습을 바꾸며 청주를 찾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수성초등학교 동완이 형제는 가로수길을 걷기 위해 답사에 참여했단다. 6학년 3반이라는 이은자님은 가로수길에 널려있는 담배꽁초를 부지런히 줍는다.
오가는 길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더불어 사는 걸 배우고, 선조들의 삶 속에 숨어있는 지혜와 슬기를 찾아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주춧돌이 되는 게 청주삼백리 답사의 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