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6.25)등 수차례의 전란에도 끄떡없이 견뎌온 거대한 성문이 화마에는 힘없이 한순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양녕대군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지는 숭례문의 현판도, 화재 등 재난을 막아준다는 장식물 치미(망새)도 끝내 화재 피해를 막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관리소홀과 초기대응미흡으로 인한 인재였다는데에 이견이 없기에 더욱더 분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화마 앞에서는 너무나 초라한 관련당국의 모습과 그로인해 무너져가는 숭례문을 보면서 잠못이루는 밤을 보냈다.
숭례문은 국보1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너져 내린 것은 온 국민의 가슴이 무너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서울역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거리에있는 숭례문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600년이나 된 목재 등 기초재료가 모두 불타 원형 복원을 한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국보로서의 상징성은 갖기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문화재적 가치 측면에서는 씻기 힘든 손실이라고 안타까와 했다. 그만큼 너무나 큰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10일 화재로 누각이 무너져내린 숭례문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1호로 지정됐다. 현존하는 한국 성문으로서도 가장 규모가 커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였다.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8개 문 중 정문으로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됐으며 600여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됐다. 이후 몇 차례의 소규모 정비공사가 이뤄졌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이 자리잡은 구조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의 ‘우진각지붕’인데 지붕 처마 아래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또 하나의 공포를 넣은 화려한 다포 양식으로 돼 있다. 임진왜란 때 성 안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몇 채 남지 않은 건물 중의 하나로 조선 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조선중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崇禮門’(숭례문) 현판은 관악산의 불기운을 위해 양녕대군이 여느 건축물의 가로 현판과 달리 세로로 썼다고 기록돼 있으나, 세종의 셋째 아들로 조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현재 힐튼호텔의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된 형태였다. 서쪽으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광무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해 동대문과 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면서 훼손이 시작됐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가 가속화했다.
특히 1907년 일제가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도로에 둘러싸여 고립돼 오다가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됐으며 2006년 3월에는 100년만에 홍예문이 일반에 개방됐다. 개방시간은 오후 8시까지로 제한됐으며 화재가 난 2층 문루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돼 왔다(한국일보 기사입력 2008-02-11).
학생이나 일반인들 모두 서울역을 지나 도심으로 진입하려면 숭례문을 지나야 한다. 숭례문을 지나야 홍인지문도 지날 수 있다. 경복궁도 갈 수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는 굳이 내려서 숭례문을 둘러보지 않더라도 그대로 산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이 숭례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기만해도 산교육이 되는 곳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특히 바로옆에 남대문시장이 위치하고 있어, 외국인들이라면 빠지지 않고 둘러보는 곳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이런 숭례문이 600년의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우주를 왕복할 수 있을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한 문명시대에...
밤새워 텔레비젼의 뉴스속보를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 출근했을때도 대부분의 교사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했는데, 성문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아무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성문이 화재로 무너지다니.... 수많은 소방차가 동원되었어도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는 아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커져만 갔던 것이다.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아이들과 함께 지나면서 역사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복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긴 하지만 이미 무너져 내린 후의 복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 이상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안된다. 이제는 숭례문으로서의 산교육이 아닌, 재난을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산교육이 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숭례문을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이 지나가겠지만, 뇌리에는 문화재로서의 가치있는 교훈이 아닌, 인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단 4시간만에 숭례문이 주는 교훈은 정 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