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상당산성의 공남문주차장에서 김시습시비, 공남문, 남암문, 미호문, 북장대, 동암문, 막거리능선, 천자봉, 돌산재능선, 새터말, 404고지, 목련공원능선, 홍고개, 수레너미마을까지의 시경계선을 돌아보는 답사산행을 했다.
이날 충북 역사의 산증인이면서 늘 지역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참여연대 강태제 대표가 참여해 상당산성의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며 답사산행에 참석한 청주삼백리 회원들이 지역의 문화재와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우리가 답사한 상당산성(사적 제212호)은 둘레 4.2㎞, 높이 6∼13m, 면적 5만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며 치성이다. 상당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김유신 장군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조에 '고상당성'은 율봉역의 북(뒤)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 7773척인데 성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상당산성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충청도의 군사책임자인 병마절도사가 해미읍성에서 청주읍성으로 자리를 옮긴 후 병마우후에게 상당산성을 방어하게 했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상당산성에는 약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는데 지금의 상당산성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에서 45년까지 청주병사 유성추의 감독으로 대대적인 성벽개축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다는 기록이 성문의 무사석에 남아 있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鎭東門진동문)ㆍ서문(弭虎門미호문)ㆍ남문(控南門공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ㆍ남암문의 2개 암문, 동장대,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있다.
청주 시민들에게 익숙한 상당(上黨)은 백제 때 청주 일원을 일컫던 지명으로 상당산성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상당산성은 시내에서 가깝고 청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평일에도 청주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며 휴식공간이다. 성내에 전통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있어 민속주인 대추술과 다양한 토속음식을 먹을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 의해 그동안 친일행위자 민영휘 일가가 소유하고 있어 복원사업에 걸림돌이었던 상당산성 내 임야 등 30만 1568㎡가 국가에 귀속되며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전남 구례의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에 소장되어 있는 '상당산성도'의 옛 모습 그대로 복원공사가 진행될 날도 멀지 않다.
주차장에서 공남문으로 오르는 잔디밭 한편에 김시습 시비가 서있다. 이곳에서 시경계선 답사산행의 일정을 안내받고, 김시습의 일생과 상당산성을 노래한 ‘유산성(遊山城)’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芳草襲芒屨(방초습망루)/ 新晴風景涼(신청풍경량)/ 野花蜂唼蘂(야화봉삽예)/ 肥蕨雨添香(비결우첨향)/ 望遠山河壯(망원산하장)/ 登高意氣昻(등고의기앙)/ 莫辭終夕眺(막사종석조)/ 明日是南方(명일시남방)
김시습은 세조가 어린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불살라버리고 세상을 조롱하며 전국을 유랑하다 생을 마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청주삼백리 송태호 대표는 시비에 써있는 내용과 청주문화의 집 임병무 관장의 글에 나오는 내용을 비교하며 김시습이 살던 시절의 시대상과 처해있던 상황을 고려한 임병무 관장의 해석을 높게 평가했다. 한자 세대가 아닌 사람들은 역시 한시를 번역하는 일이 어렵다.
- 시비에 써있는 내용
〈꽃다운 풀 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활짝 갠 풍관 싱그럽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 와 꽃술 따 물었고/ 살진 고사리 비갠 뒤라 더욱 향긋해/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랴 또 본다네/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니〉
- 임병무 관장의 글에 나오는 내용
〈꽃다운 풀이 헤진 짚신을 파고드는데/ 날 개이니 풍경이 처량하여라/ 들꽃에는 벌이 와서 꽃잎에 입맞추고/ 살찐 고사리에 비가 내려 향기를 더하네/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아라/ 사양을 말고 저녁내내 바라보시게/ 내일이면 남방으로 떠나갈 것일세〉
시의 제목인 ‘유산성(遊山城)’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유(遊)를 일반적인 ‘놀 유’로 보면 ‘산성에서 놀며’로 해석되지만, 대체적으로 ‘배울 유’로 보아 ‘산성에서 배우며’로 해석하거나 등산을 유산이라고 하던 시대상에 맞춰 ‘산성에서’나 ‘산성에 올라’로 해석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다.
설화나 풍수지리에서 하늘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얘기한다. 옛날 사람들은 푸른빛을 띤 상상속의 동물 청룡(靑龍)은 동쪽의 신으로 물, 용감하고 용맹스러운 백호(白虎)는 서쪽의 신으로 바람, 봉황을 닮은 붉은 새 주작(朱雀)은 남쪽의 신으로 불, 거북과 뱀이 합쳐진 현무(玄武)는 북쪽의 신으로 땅을 다스린다고 믿었다.
공남문 천정에 그려있는 주작을 보면 이곳이 남쪽의 문임을 알 수 있다. 주조(朱鳥)라 불리기도 하는 주작은 불을 다스리는 남쪽의 수호신으로 현실과 상상의 동물이 복합된 봉황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상당산성에 있는 ‘控南門, 弭虎門, 鎭東門’의 이름도 사방신과 관계가 있다. 특히 서문인 弭虎門(미호문)은 서쪽을 다스리는 백호의 虎(호)와 그치다를 뜻하는 미(弭)의 합성어로 이곳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미호천과도 연관이 있어 그 당시 성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의 문장력이 높았음을 알게 한다. ‘控南門, 弭虎門, 鎭東門’의 현판은 모두 초등학교 졸업학력으로 의학박사이자 서예가이며 화가였던 서봉 김사달 박사의 글씨이다. 공남문과 미호문의 무사석에 공사관계자들의 이름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어 그 당시에 벌써 실명제가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상당산성의 해맞이 언덕은 공남문까지 이어진 성벽과 청주시가지의 조망이 좋다. 이곳에서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비밀통로였던 암문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한남금북정맥은 해맞이 언덕 아래에 있는 남암문에서 만나 궁예가 쌓았다는 성벽이 발견된 미호문, 상량산의 정상인 북장대 터, 진동문 가기 전에 있는 동암문까지 이어진다.
미호문을 지나면 북쪽으로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산성길이 한참 이어진다. 북쪽과 동쪽의 산성길이 만나는 곳에서 오른쪽 산길로 20여m만 올라가면 491.6m의 상당산(상량산)정상인 북장대 터가 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안질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별궁인 행궁을 설치하고 60일간 머물렀던 곳이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에 있는 초정약수다.
세종대왕의 행궁이 설치되어 있던 기간에는 초정약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 상당산성의 북장대 터에 왕궁으로 연락하는 봉화대가 있었다. 우거진 나무들을 제거하고 봉화대를 복원해 놓으면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볼 수 있는 곳이건만 잡목 속에 숨어있어 찾는 사람이 없다. 문화정책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현장이다.
동암문을 나서 산성길을 벗어나면 시경계선을 따라 가는 길이, 조금 더 가면 한남금북정맥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시경계선을 따라 낭성면 삼산리의 천자봉과 돌산재능선을 지나면 청주대추술 도가가 나타난다.
상당산성에서 낭성으로 가는 154번 도로를 건너 오솔길로 들어서 404봉에 올라서면 바로 앞에 막 지나온 천자봉과 청주대추술 도가, 좌측으로 남암문에서 진동문까지 이어진 상당산성의 성곽이 한눈에 보인다.
공원묘지인 목련공원 능선을 지나 다시 15번 도로로 내려서면 야트막한 고갯길이다. 중간부분이 불룩 나와 있어 '홍고개'로 불리는 이곳에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불무혈 자리가 있다고 알져져있다.
명당자리도 세월에 따라 변하는지 주변에 쓰레기가 지천이다. 가까운 거리지만 쓰레기를 주우며 걷다보니 30여분 걸려 이번 답사산행의 최종 목적지인 현암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있는 수레너미마을은 한남금북정맥에 걸쳐있는 유일한 마을로 청주와 낭성을 이어주는 길목이다. 이곳에는 옛날 이 길이 오솔길이었을 때 지나가던 스님이 머지않아 우마차가 지나다닐 것이라고 예언한 후 청주와 낭성을 연결하는 길이 만들어져 수레너미로 불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답사산행의 말미에서 이날 동행했던 강태제 대표가 청주읍성이 사라진 것을 왜 그렇게 아쉬워했는지를 생각해봤다. 수원성,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같이 청주시내에도 무심천 옆으로 롯데영플라자(동문), 서문시장근처(서문), 국민은행남문점(남문), 성안길 입구(북문)에 네 개의 문이 있던 읍성이 있었다. 청주읍성은 일제 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근대의 도시화에 의해 현재는 원형을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성의 안쪽에 있던 길을 뜻하는 '성안길'은 지금도 시내 중심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상당산성의 복원사업과 함께 가치를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역사적으로 소중한 청주읍성도 빠른 시일 내에 복원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상당산성 등산>
1. 제1코스 - 약 1시간 40분 소요
공남문-남암문-미호문-북장대-동암문-진동문-동장대-저수지-공남문
2. 제2코스 - 약 1시간 소요
산성마을-공남문-남암문-미호문-산성마을
〈성에 관한 지식>
*포곡식산성 : 내부에 넓은 계곡이 있고,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이다.
*치성 : 성곽의 일부를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서 凸 모양으로 만들었다.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는 꿩(雉:치)에 비유해 치성이라고 부른다.
*암문 : 적에게 들키지 않게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작은 문을 만들어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 암문(暗門)이다.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덮어 문을 없앴다.
*내탁공법 : 산의 경사면에 성을 쌓은 후 그 성벽과 산지와의 사이에 생긴 간격을 자갈과 흙으로 채워 성토함으로써 성벽내부에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다.
*여장 : 성벽 위에 쌓은 담으로 전쟁 시 적의 공격을 피하며 공격할 수 있다.
*치성 :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되게 쌓은 성벽으로 평시에는 외부를 관찰하는 감시초소, 유사시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역할을 하는데 상당산성에는 남문 주변에 3개가 있다.
*용도 : 성문주변에 양쪽으로 담을 쌓은 것으로 성문으로 침입해 들어온 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
*옹성 :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으로 모양이 반으로 쪼갠 항아리와 같아 옹성이라 하는데 상당산성에는 옹성이 없고 치성과 용도가 있다.
*수구 : 성벽에 쌓이는 물을 밖으로 배출시킴으로써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배수구로 상당산성에 3개가 있다.
*체성 : 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부분이다.
*미석 : 체성과 여장사이에 납작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것으로 마치 눈썹처럼 보여 미석이라 하는데 상당산성에 원형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