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에 갔다. 바람이 불었다. 익은 과일들이 마구 떨어지고 있다. 힘센 사람은 잘익은 과일만 골라 담는다. 힘없는 사람들은 덜익은 과일이나 썩은 과일밖에 담을 수 없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담아놓고 먹을려면 썩은 과일 중에서도 상태가 좋은 것은 힘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긴다. 결국 남은 것은 썩어서 먹을 수 없는 과일, 버릴 수 밖에 없는 과일만 가득 찬 바구니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썩은과일을 가져다가 어디에 쓸 것인가. 그냥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학교 자율화를 한다면서 수많은 자율권을 각 시·도 교육청으로 내려 보낸지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에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유지할 것과 폐지할 것을 나누어서 발표했다.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없어지는 것과 남는 것을 살펴보면 학교로 넘겨진 권한은 속빈강정에 불과하다. 실제로 꼭 필요한 것들은 그대로 계속해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고, 별로 필요하지 않고 중요성 역시 크지 않은 것들만 학교로 넘겨졌다.
우열반 편성 논란이 가중될 것이 뻔한 '수준별 이동수업'은 학교장에게 맡겨지고, 교육과정 편성이나 학업성적관리대책등은 그대로 규제를 가하고 있다. 수준별이동수업의 경우도, 모조리 학교에 넘겨준 것이 아니고, 겨우 '영어ㆍ수학 교과에 한해 중1∼고1학년에서 중점적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일선학교가 이동수업의 대상 과목을 확대하는 것과 수준을 세분화하는 문제를 결정' 할수 있도록 한 것 뿐이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학교에 뭔가를 크게 넘겨준 것처럼 보여질 우려가 있다. 수준별 이동수업이 개정되는 교육과정에서는 일선학교에 권장사항으로 되어있다. 학교여건에 따라 적절히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서울시교육청 발표대로라면 기본적으로는 꼭 해야 하며, 현재의 수준에서 더 확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학교장 재량으로 넘겨진 것이다. 만일 지금보다 축소하면 말그래도 큰일이 날 것이다. 손 발이 안맞는 것이다.
또한 `봉사활동 운영 지침'에 따른 학교급별 봉사활동 시수 등에 관한 사항은 시교육청 차원의 `교육과정 운영 기본계획'에 반영하며 초ㆍ중등업무 전반에 관한 국가 차원의 정책 설명, 시책 시달 등을 반영한 `초ㆍ중등 주요업무계획'도 시교육청의 주요 업무계획에 반영할 계획이다. 기존과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현재와 다를바 없다. 주요업무계획이나 장학지침이 일선학교의 교육과정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는데, 더 강화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학교교육을 파행으로 가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어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리단체에서 개별프로그램 운영을 학교내에서 가능하도록 한 것과, 수능 이후 고3 학생이 학원 수강을 할 경우 출석으로 인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수능 이후 교육과정 운영 내실화 방안'이 폐지된 것이 그 예이다. 올해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부터 중학교 3학년 2학기 성적을 반영하여 학교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도록 하겠다던 시교육청에서 수능이후 교육과정 운영 내실화 방안을 폐지시킨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정상적인 교육과정운영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고등학생 뿐이겠는가. 중학교에서도 난리가 날 것이다. 왜 고등학교만 혜택을 주느냐고..... 학교의 존재 필요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갑작스런 세부추진계획 발표가 당황스럽다. 논란을 가중시킬 문제는 더 신중히 검토하여 수정발표해야 옳다. 규제철폐를 통한 학교자율화의 논란이 갈수록 더해지는 시점에서 최소한 그 논란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서울시교육청에서 하지 않았으면 한다. 수정해야 할 것은 과감히 수정해야 한다. 더욱이 이런 문제를 논하면서 '교육여건개선'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더 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