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참는 여유가 필요하다

2008.11.28 09:45:00


얼마 전 산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둘러 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있을 즈음, 어떤 여자가 내게 반가운 표정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 편이기에 적이 당황하였다. 언제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지난 번 산행 중에 만난 분은 아닐까. 아니면 사무실에서 업무상으로 만난 분은 아닐까 등을 생각해 보았지만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상대방을 잘 모르니까 더 이상 어떤 인사말도 나누지 못했다. 옆자리의 동료는 누구냐고 물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바가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지, 또는 어디서 만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 여자가 도대체 누구일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가 출발할 무렵 그 여자는 사과를 예쁘게 깎아 먹기 좋게 조각까지 내어서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웃는 낯으로 감사하며 받았지만 그 여자가 누구인가만을 생각하였다. 차는 곧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는 별스런 걱정까지 슬금슬금 생기는 것이었다. 혹시 내가 일을 잘못 처리해줘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나의 못된 괴벽까지도 송두리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닐까 등등. 그 여자의 밝고 환한 표정으로 보아 내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약 두어 시간 후 차는 도착지에 도착했다. 짐을 챙겨 내리는 순간 폭염이 내리쬐는 어느 여름날 오후, 아파트 주차장이 떠오르면서 그녀의 정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8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오후였다. 휴일이어서 오전 내내 집안에 있다가 약속이 있어서 서둘러 집을 나와 차를 타려고 하는데 내 차 뒤에 아무렇게나 주차된 그 여자의 차 때문에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가 약속 시간에 빠듯이 될 수 있는 시간인데 차를 뺄 수 없으니 참 난감하였다. 마치 바둑판의 사석처럼 사면이 꽉 막힌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 차의 운전석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경우에 어디에라도 붙여놓았을 법한 연락처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락처는 아무리 살펴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이랬을까. 등줄기와 얼굴에는 비 오듯 땀이 흐르면서 슬그머니 화가 났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관리사무소로 달려갔다. 차량번호를 대면서 빨리 주인에게 연락해 달라고 했지만 시간은 이미 약속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그 차는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애를 태우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한 여자가 성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 여자도 어쩔 줄을 몰랐다. 마냥 미안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를 본 순간 화가 더 났다. 그래서 대뜸 “날도, 더운데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 차를 이렇게 세워요?”한마디로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그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차를 서둘러 뺐다. 더 이상 그 여자와 싸울 수도 없고 해서 차를 끌고 나왔지만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에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아내는 아까 오후의 상황을 다 말하는 것 아닌가. 우리 통로의 몇 층에 사는 여잔데, 아주 절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오히려 내가 가시 돋친 말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상황이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 이러쿵저러쿵하기 보다는 차라리 싱긋 웃으면서 그 상황을 비껴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당시에는 그런 여유로운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 왔다.

“날도 지독하게 덥구먼,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 차를 이렇게 세워요?”

잔뜩 가시 돋친, 그리고 화가 가득 담긴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빙빙 돌았다. 아까 반갑게 인사하고 맛있는 사과를 예쁘게 깎아 온 여자가 바로 그때의 운전자인 것이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심코 가시 돋친 한마디를 뱉어놓고 내가 더 불편해 했던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도 그 여자도 그때 무슨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서 의 차 앞에 잠깐 주차를 했을 터인데 나는 왜 그때 편안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의 일상 가운데 늘 이렇게 스스로 속 좁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늘 사후약방문식으로 후회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참 넓은 것 같지만 너무나 좁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보았다고,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다. 언제든지 가까운 이웃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날의 일은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의 지혜와 원리를 일깨워주었다.
송일섭 (수필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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