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교육현장 37년을 마치며 ⑤

2010.04.02 17:21:00



여고에서의 생활은 여학생들이 자신의 내신 성적을 걱정해 미술이나 음악 시간에도 꼼꼼히 준비하고 시간 중에 열심히 노력하므로 지도교사의 신경을 크게 거슬리게 하지 않는 점이 좋았는데, 1996년 다시 실업계고교에 발령받아 내 교직생활에서 가장 험난한 4년을 보내게 된다.

첫해 신학기 시작 전부터 조짐이 왔다. 야간부 수업까지 맡아야 하는데 그 시간이 2시간, 그 외 산업계특별학급 1시간 총 시수 19시간이란 것. 이미 단단한 각오가 돼 있고 다른 방도가 없기에 그렇게 맡겠다고 약속했는데 이틀 정도 지나 2부 교무부장이 불러 가보니 2시간 잘못 계산한 점 양해를 구한다며 총 21시간이라고 통보했다. 착각할 게 있지 머리끝까지 치솟는 원망을 억누르고 매주 2시간 늘어나는 수업은 맡을 수 없다고 버틴 결과, 합반 강행 총 19시간으로 조정했지만 퇴근시간에 남아 가르치거나 한 교실에 남학생 100여명을 앉혀놓고 입시강의도 아닌 실기수업 합반이라니. 수업이 끝날 무렵 오는 학생, 붓 한 자루 없이 오는 학생, 허점 보이면 대항하는 학생, 쉬는 시간 잠시 눈 돌리면 폭행사고 내는 학생들을 일일이 따지고 갋으며 1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후배교사가 겸무로 온 덕분에 시간 수가 좀 줄어든 이듬해엔 어김없이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기계과 등 7개학과 16개 반 중 학력수준은 퍽 낮으면서 지금 생각해도 자존심 강하고 영악한 학생들이 많았다. 처음 담당하는 내입에 맞는 떡이 내게 올 리 만무했다.

입학식 날 신입생 안내를 죽 지켜보던 학부모 중 따로 부탁할 일이 있다면서 만나자는 노인이 있었다.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는 손자를 부모 대신 돌보고 있는데 새엄마가 어려서부터 친엄마인 줄 알고 자란 손자가 요즘 축구한다며 밤늦게 들어와 신경 쓰여 담임께 특별 지도를 좀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학생에 대한 특별 지도계획을 세우고 그를 불러 조부모님 희생과 헌신을 일깨운 뒤, 나름대로 매일 관심 가지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관찰하고, 그에게 한 권의 노트를 주며 특별한 형식 없이 간단한 생활 기록을 적어오게 했다.

처음에는 ‘잊었습니다, 어제 못 썼습니다, 깜빡 했습니다’ 며 기록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노트를 제출하는 날마다 댓글 달듯이 꼭 시간 내어 '그건 잘 했고 이건 고쳐야 한다, 인생 선배로 겪은 역경의 추억담, 시사 관련 교훈' 등 닥치는 대로 그의 일기노트에 무엇인가 긁적이는 훈화 전달을 계속했다. 손자를 바르게 이끌려고 조부가 내민 메모, 깨알 같은 글씨로 몇 월 며칠 언제부터 무슨 용무로 외출해 언제 돌아왔다는 그 쪽지를 보는 그 날 그 순간 나는 그의 습관을 반드시 제대로 고치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를 했다. 수업 중이나 점심 때도 항상 그에 대한 관찰과 행동 수정을 위한 처방과 치료에는 한계가 없었다.

여러 달이 지나 축구밖에 모르던 아이가 성적 우수한 친구에게 뭘 묻기도 하고 공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여간 기특하지 않아 그의 조부에게 전화로 이제 전처럼 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다면서 변화과정을 전하기도 했다. 1년 후 그 조부로부터 4천원짜리 점심 한 그릇 대접 받은 것밖에 없지만 내가 좋아서 한 내 나름대로의 담임 역할을 다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학년이 바뀌어서도 차를 타고 외부의 컴퓨터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등 자신의 장래에 책임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 눈에 띄더니 졸업 후 그의 조부가 다른 일로 내게 전화를 해왔기에 학생 안부를 물었더니 전문대학 재학 중 군에 가 있다는 말씀. 그의 전화는 아직까지 없다.

규칙적인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한 번은 가방 속에 책은 없고 비디오테이프만 19개를 갖고 온 학생이 있었다. 가정에 연락했더니 어머니가 학교로 달려와 잘못 가르쳐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2만원을 놓고 가신다. 학생을 불러 어머니 다녀가신 얘기해주며 그를 통해 가정에 돈을 돌려보내었다.

자퇴하겠다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친구나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심사숙고 없이 쉽게 일탈행동으로 옮기는 가출행위는 담임교사 혼자 해결하기 가장 힘든 일이 아닌가 싶다. 청소년의 특권인가? 한 달 사이 연거푸 셋이 가출한 일이 있었는데 매일 출근하면 전화부터 했다. 어떻게 돼 가는지, 학생에게서 연락은 왔는지, 담임이 부모에게 먼저 걱정한다.

그 중에는 담임의 간곡한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퇴만 고집하더니 어느 날 자장면 집 주방장이 ‘고등학교도 안 나오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는 딱 한 마디에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학생, 아버지가 경찰인 친구와 주유소 아르바이트 하며 새로운 생활을 꿈꾸다가 몇 주 만에 돌아온 학생, 학교운동부로 운동만은 착실히 하더니 담임 골탕 먹이기로 작정했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출 3총사가 된 학생. 모두 담임 속 썩이다 무사히 돌아온 것만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가장 신경 쓰이고 가슴 아픈 일은 전혀 말썽 없던 학생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통고였다. 학교에서는 세 번 쯤 학부모를 불러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자퇴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나의 부질없는 욕심일까?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꼬여 보기도 하고 학부모 원망도 하고 나의 힘들었던 과거사까지 소개하며 학교공부는 꼭 계속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수업료면제 혜택을 주겠노라, 한 번 더 생각해 보라 간절히 호소해도 안 돼 한 번은 ‘뭘 먹고 이런 얘를 낳았소?’ 라고 욕설 아닌 독설을 퍼붓기도 하며 30일 후면 반드시 후회할 것을 예고했다. 반복된 경고에도 막무가내로 자퇴만이 살길인양 하소연하더니 한 달 후 아니나 다를까 ‘지금 편입할 수 없겠어요?’하고 찾아온 적도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더 있다. 여러 번 전화 시도 끝에 ‘아들이 갑자기 학교를 안 다니겠다니 부모도 어쩔 수 없다’는 어머니 대답. 그녀는 청소부로 일하며 남편은 장애인이라 따로 있고 생활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밤낮 다른 도시의 호텔에 출근한다니 가정방문도 불가능하고 전화로 출석을 독려했다. 경제형편이 문제라는 판단 아래 어렵게 자란 나의 학창시절을 전하기도 하며, 몇 차례 편지 교환해 보니 글씨체가 반듯하고 남다른 교양이 내비치는 그녀에 홀렸는지 내 힘으로 반드시 자퇴를 무산시키리라 다짐했다. 우리 아들에게도 용돈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내가 수업료 내기 힘들다면 내 성의를 보태겠노라고 10만원을 동봉하여 편지했다. 말썽 부리던 다른 학생 학모도 감동해 함께 성의 표시하겠다던 말도 전했다. 선생님 성의 감사하지만 받을 수 없다며 돈은 되돌아 왔기에 보태겠다던 학부모에게도 뜻을 거두시라 전했다. 줄기찬 노력도 허사가 되고 학생 자퇴서류를 우편으로 받아 처리하고 나서 무슨 교육이 이렇게 힘들까 하는 허탈한 심정으로 퇴근할 때 평소 아내에게 직장에서의 이야기 거의 하지 않던 내가 ‘요새 학교 안 다니겠다는 녀석들 때문에 골치 아파 그만두고 싶다’고 하소연해보기도 했다. 

전에도 겪은 일이지만 역시 한 달 후 자퇴생 외삼촌이란 분이 찾아왔다. 학생 소식을 전혀 몰랐는데 학생을 어떻게 원상복구 할 수는 없겠냐며 조심스레 입을 여는 것이다. 안타깝고 기가 막혀 지금껏 보낸 편지 복사본, 학생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관했던 터라 그 분 앞에 던지다시피 하며 소리쳤다. 제가 분명히 ‘혼자 생각해 판단하지 마시고 반드시 집안 어른들 함께 의논하시고 신중히 결정하시라’ 당부하지 않았느냐고 편지 속 문장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자신의 처지가 서럽고 장애 상태의 아버지나 가문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아무도 몰라주니 학생을 일부러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소문조차 내지 않아 몰랐다는 충격적 내막을 그 분에게 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 슬픈 드라마 아닌가.

시간만 나면 엎드려 자는 학생이 있었다. 덩치 큰 낙천적 학생이 담임 흉내 낸다고 ‘야, 일어나! 시도 때도 없이 자고 있어 이놈’하고 자는 학생을 건드렸다. 잠이 깨어 기분 상한 몸이 가냘픈 학생은 다음 날 자신을 깨웠던 학생에 복수하려 했나, 헌 부엌칼을 가져와 여선생님 시간에 꺼내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발생했다. 사고 원인은 매일 컴퓨터 오락에 밤이 깊도록 몰입하던 학생이 현실과 사이버공간을 분간 못하고 저지른 우발적 행동이었나 보다. 청소년 돌출행위는 예측을 불허한다. 교사는 학생 앞에 찬물도 눈치 봐서 마셔야 하는 세월이다. 상담교사에 인계해 충분하고 심도 있는 정신치료를 부탁했다.

전공별 사무실, 실습실도 많고 교직원도 130명이 넘는 큰 학교에서 부장교사직을 2년 맡아 더 근무하는 동안 짧은 시간에 과별로 흩어져 근무하는 7개 학과 16학급 담임에게 주의사항이나 교육일정 등을 전달하는 학년회의 업무는 바쁘고 신경 쓰이는 일과였다. 전국기능경기대회를 앞두고 고사를 지내던 일, 출장가려면 직접 교체수업을 정하고 나가야 했던 기억 새롭다. 자동차과 H군은 컴퓨터에 능해 실장인 그에게 급할 때는 많은 도움을 구했다. 기계과 학생들도 문제를 일으키는 일 거의 없었다. IMF 이후 가정형편들이 어려워 학생 수학여행을 계획했지만 동의하는 가정이 절반을 겨우 넘기는 정도여서 1박 2일 수련활동으로 대신했다. 미술시간에는 비누 깎아 운동감 표현하기, 색종이 오리고 접어 구성하기, 분필이나 젓가락에 새기기, 사진 모자이크, 포토몽타주 등 큰 돈 안 들이고 흥미롭게 창작할 수 있는 주제를 택해 수업했다. 솜씨가 뛰어나거나 섬세한 기교파 학생도 더러 눈에 띄었다.

고등학생 미술동아리 ‘미구회’ 멤버였던 친구들끼리 30년만에 만나 스케치 여행도 하고 방송출연에 이어 D백화점 갤러리에서 ‘신미구회전’을 개최했는데 회장을 맡은 방송국 PD친구 덕분에 수많은 화환과 손님들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번도 개인전을 갖지도, 작품을 판매하지도 않았던 내게 영광스럽게도 2절 수채화 ‘계림풍경’이 100만원에 팔리는 행운을 안겨준 건 1997년이다. 의결에 따라 그 절반을 발전기금으로 내고 자축파티를 하고나니 33만원 남았지만 우정을 나누고 삼삼오오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장희 안심중학교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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