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한 세계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유럽인의 삶을 그는 황무지로 표현하였다.
만물이 소생하는 달이어야 할 3월. 힘찬 대지의 기운을 받고 일어서야 할 인간의 희망은 푸른 초원의 싱그러움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 연속 터져 나오는 교육 비리는 현장 교사들의 마음에 더욱 무거운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 같아 대지의 부름을 다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푸르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어 4월을 맞이하여야 할 시점에 검은 구름만이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 어쩌 보면 거치고 가야 할 과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학교현장이 부정의 온상으로 얼룩져 있는 것마냥 대대적으로 공개함이 과연 교육 현장을 개혁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교직은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 주는 마지막 보루라고들 한다. 거듭되는 교육계의 부정이 터질 때마다 학교현장에 미치는 학생들의 반응은 더욱 냉담하기만 하다. 교사들을 의심하는 횟수가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부교재를 선정하는 데도 왜 선정했느냐고 왜 선생님이 교재값에 관여하느냐고 참으로 시시비비를 다 간섭으로 일관하는 사태를 주시하고 있노라면 무엇이 이들에게 불신을 심어 주었는가 하는 의구심조차 든다.
교사를 보고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예전의 일이 되었다. 이제는 교사의 지시도 불응하고, 심지어는 교사에게 비어를 사용하며 대꾸하는 사례가 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더구나 상급 관청의 체벌 금지는 학생들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듯하다. 벌을 받는 데도 오히려 벌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하는 아이러니가 나타남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이 예뻐야 여자지”라는 노래 가사가 이제는 사라진 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간 것 같다. 여학생의 흡연, 폭력은 이미 매스컴을 통해 보여준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때로는 다정한 여학생이 어떨 때는 두렵기까지 하다.
교사가 제자를 포옹해 주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포옹해주는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포옹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더 두려워 진다. 사제 간의 불신을 보고만 있자니 교사된 도리로서 죄책감마저 든다. 인성 교육으로 치료하고, 다정한 언어로 치유하고 자상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푸른 마음이 더 교사에게 필요한 때에 4월의 푸른 하늘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 지, 대지에 계속 눈을 뿌려 얼어붙은 교사들의 마음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급하게 돌아가는 시간이요, 교사들에게 변화를 재촉하는 흐름이다. 자신을 주무하기에 급한 교사는 다른 불필요한 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 그런데 사사건건 교육계의 비리가 정작 교사들의 정직에 오점을 남기지는 않는 지 걱정이다.
터져나오는 사건이 찻잔 속에 태풍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자리잡고 있다. 썩은 부위는 빨리 도려내야 성한 것이 상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썩은 부위를 잘라내기 위해 이것저것 다 뒤지다 보면 과일 전체를 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에 썩은 부위는 보이는 대로 그때그때 잘라내는 것도 당연한 과제인지 모른다. 썩은 부위가 너무 많다고 다 도려내다 보면 성한 것은 오히려 썩은 부위에 묻혀 상한 것으로 오인받게 될 수도 있음을 생각이 필요한 때다. 3월의 싱그러운 싹이 4월에 피어날 수 있어야 한여름의 싱그러운 초원은 형성되는 것이다.